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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게 독서하기> 남북정상회담 600일

이시대 2013. 3. 7. 11:36

 

남북정상회담 600일(최원기, 정창현, 김영사, 2000)

“한국 외교의 매력, 남북정상회담”

2000년 6월 13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모두들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대형 TV가 있는 곳엔 사람들이 몰렸고, 각 가정마다 똑 같은 장면을 시청하고 있었다. 서울발 평양행 비행기가 순안공항에 미끄러지듯 도착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한의 지도자가 북한의 땅을 밟은 것이다. 그리고 이내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모두 경악스러워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일이 공항으로 직접 마중 나와 웃고 있는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금 떨어진 옆에는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 1부위원장, 김국태, 김용순, 최태복 노동당 중앙위원회 인사들까지 북한 최고 지도부가 영접을 하러 온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계단에서 조심히 내려오자 김정일 위원장은 원로에 대한 예우를 갖추듯 앞까지 걸어온 후 두 정상은 손을 굳게 맞잡았다. 세기가 시작하는 첫해, 당당한 한국 발 외교는 전 세계로 뻗어져 나갔다. 실제로 남북정당회담이 성공적으로 성사된 직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 일본의 모리 요시로 총리, 러시아 푸틴 대통령, 중국 장쩌민 주석은 한반도의 기류 변화를 감지하고 각각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정상들만의 축제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남과 북의 적대적 개념이 후순위가 되었으며 동포애가 한반도를 뒤덮었다. 물론 이 장면을 극도로 저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모든 것은 놀람의 연속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마치 남북을 아우르는 원로로서 마주치는 상대방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통해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녹였으며, 기나긴 정치인생이 말해주듯 관록이 있어보였다. 김정일은 그동안 괴팍하고, 음흉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실제로 그를 보면서 사람들은 기존의 관념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TV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당당하고 활기차며 군부를 제대로 통제한 듯 한 언행을 통해 카리스마가 있어 보였다. 때때로 공식적인 외교의전을 뒤로하고 양 지도자는 격의 없어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실무자들은 간담이 서늘했을 터다.

사실 이러한 대 감동을 주기까지 얼마나 어려웠던가. 남북정상회담의 모든 총책임자는 역시 평생을 남북 화해와 평화를 외친 김대중 대통령이었지만 실무 총책임자는 임동원 국정원장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역사 속에서 반공 논리를 확대 강화시킨 안기부-국정원이 제 1적성국가와 막후교섭을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보면 정말 뜨악할 장면이다. 임동원 국정원장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재직 시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베테랑으로서 회담을 막후 조율했고 공식라인으로는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청와대에서는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이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북한에서는 김용순 통일전선 담당비서와 임동옥 제1부부장이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추진사항은 물론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추진과정의 가장 큰 어려움은 1999년 미국의 CIA를 비롯한 정보라인이 북한의 금창리에 대한 핵시설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 찾아왔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원장의 노력으로 대북조정관 페리를 설득함으로서 우선 급한 불은 꺼둘 수 있었다. 그리고 4월 10일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언론에 전격 공개함으로서 4.13총선을 겨냥한 포석이 아니냐는 비판이 쇄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다 소화해내고 이뤄진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긍정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최원기, 정창현 교수가 지은 『남북정상회담 600일』은 정상회담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담겨져 있다. 이러한 한편의 한반도식 드라마를 보면서 필자가 늘 부풀어있는 대목이 있다. 6.15 공동선언이라는 구체적 합의사항은 물론 남북정상회담의 꽃이지만 여기서 언급은 미뤄두고 당시 한반도 외교가 보여줬던 희망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대대로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남, 북 당사자 교섭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그것은 주로 경제, 문화 분야에서의 부분 교섭일 뿐 언제나 정치 군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미, 일, 중, 러 라는 국제관계의 틀 속에서 정립되어 온 특징이 있다. 때문에 같은 동포들이라 할지라도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배타적 틀로 인해 통미봉남, 통미봉북과 같은 상호 배타적 전략용어들이 많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정치 군사적인 분야에서는 한국의 바람과는 달리 북-미간의 협상이 상대적으로 중요해짐에 따라 한국은 이 과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었다. 적어도 필자가 바라보는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교류가 경제, 문화협력의 단계를 포함해 정치 군사 협력을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자신감이 생긴단 말이다. “아, 이렇게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자신감을 갖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구나.” 하는 점은 필자 개인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2007년에도 역시 노무현 대통령이 방북함에 따라 이제 정상회담이 커다란 감동적인 요소보다 상시적으로 안착되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 김영삼 정부 역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성사되지 못한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만약 그때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벌써 6.15 공동선언 이후 남한에서는 두번의 정권교체가 있었다. 화해, 협력이라는 기조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유지되는 듯, 얼마전까지 고비였던 남, 북 관계를 풀어줄 카드로 정당회담 소식이 안팎에 들렸지만 '천안함' 이후 다시 신냉전 시대로 접어들었다. 냉전을 평화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평화를 냉전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쉽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더 읽어보기
햇볕정책을 위한 변론(이원섭, 필맥, 2003)



남북공동선언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13일부터 6월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00년 6월 15일


                          대 한 민 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 통 령                                           국방위원장

                           김 대 중                                               김 정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