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게 독서하기>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내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박원순, 한겨레신문사, 2006)
“노무현 대통령 탄핵, 한국형 세기의 재판”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제 16대 국회는 찬성 193명 반대 2명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켰다. 탄핵안 발의는 새천년 민주당이 하고, 한나라당이 이에 동조하는 형식으로서, 한국에서는 사상 두 번째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과거 임시정부의 불안정성을 들어 이승만 전 대통령을 제외하자면 노무현 대통령이 최초로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로부터 ‘탄핵’ 이라는 불명예를 떠안게 된 것이다.
새천년 민주당은 탄핵소추안을 발의한 근거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실정 세 가지를 제기했다. 첫째, 선거법을 위반하고, 헌법기관인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해 불법, 부정선거를 하려고 하고, 두 번째,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형 부정부패를 했고, 셋째, 국정과 민생안정은 뒷전에 두고 총선에 ‘올인’하여 국가와 국민을 파탄의 위기에 처하게 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이 같은 발의가 있자 전국에서 비판여론이 형성되었다. 국민들은 위의 세 가지 요건 뒤에 숨어있는 정치적 의도를 파악하고, 이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한국사회의 주류사회가 재편되려하자 수구세력들이 강력한 반발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탄핵발의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민심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촛불시위가 열리는 것은 물론 ‘민주화운동’ 경력이 있던 대통령에 대한 격려가 전국을 휩쓸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이를 최종 판단할 헌법재판소로 눈길을 모았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이목이 집중된 탄핵심판에서 소추안을 기각함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 대통령직으로 복귀할 수 있었는데, 이 탄핵재판 사건이 바로 ‘한국형’ 세기의 재판 아닌가 싶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역사 속에서 훨씬 기억되고,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수많은 재판을 알고 있다. 이 사건들은 모두 후대에 영향을 미쳐 수많은 사례로서, 그리고 인류의 발전에 디딤돌이 됨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박원순 변호사의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를 통해 전세계판 세기의 재판을 살펴보자.
허리는 구부정하고, 눈은 튀어나왔으며, 대머리가 인상에 깊은, 그리고 가난에 찌들어 누추한 모습을 한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섰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일흔살이었다. 그의 조국 아테네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반대로 소크라테스는 평생에 부와는 철저한 담을 쌓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테네의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무역은 발전했으며, 도시에는 튼튼한 방벽이 쌓였다. 아테네의 집권자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지어 신들에게 바쳤고, 다른 도시국가의 지성인들은 앞 다투어 아테네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함락되고 전과 달리 패전의 분위기가 도시를 휩쓸었다. 어느 국가에서나 그렇듯 패전에 대해 희생제의가 필요했고, 새로운 집권자 아니토스는 자신의 최대 반대파인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희생양으로 지목했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동시에 국가가 인정하는 신 대신 새로운 신을 섬겼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고발자는 멜레토스였고, 실질적으로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을 ‘소피스트’로 보고 반감을 가진 아니토스였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기소되었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사실 기소를 한 이들의 목적은 소크라테스가 완벽한 패배를 시인하기를 바랐다. 제대로 된 희생제의를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한 명망가의 도덕적 권위를 빼앗고, 사회의 이단아가 되어 매장되기를 원했다. 멜라토스는 사형선고를 요구하였다. 소크라테스는 희랍 법률에 따라 구류, 벌금, 추방 등을 사법당국에 요구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그대로 소크라테스의 인격을 저하시키는 결과가 되기에 그는 벌금 30므나만 낼 수 있다고 하였다. 배심원들에게 그의 이런 태도는 사형을 확정시키는 여론으로 작용하였다. 사형을 선고받고 다시 감옥에 수감된 그에게 친한 친구 크리톤이 찾아와 애걸하였다. 어떻게든 목숨만은 유지하자고 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미 죽기로 작정한 몸이었다. 죽음으로서 저들의 악랄함과 비열함을 고발할 것이다. 그에게는 목숨보다 명예가 중요했고, 그를 진정한 스승으로 바라보는 제자들이 이 재판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목숨을 부지하면 반대로 자신의 모든 것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결국 크리톤을 물리치고 묵묵히 죽음을 길을 감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역사 속에 남는 한 위대한 인물을 바라보게 되었다.
1894년 12월 19일 파리 근교의 한 궁전, 모럴 대령을 중심으로 한 군법회의의 단상은 높디높았다. 곧 그를 따라 일곱 명의 재판관들이 배석을 했고, 모럴은 피고인을 호출했다. 안경을 쓰고 광대뼈가 보일 정도로 수척해진 드레퓌스는 법정에 들어섰다. 하지만 프랑스군 장교답게 옹색한 모습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썼다. 프랑스 군부는 얼마 전 드레퓌스를 독일군 스파이로 지목하고 전격 구속한 것이었다. 여론은 날로 드레퓌스에 대해 강한 처벌을 내릴 것을 주문했다. 사건의 발달은 세계 1차 대전의 적성국가인 독일의 스파이가 프랑스군 내에서 암약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독일 대사관에 정보원을 심어 논 결과 독일에게 보내는 군사 기밀문서가 발견되었고, 이 기밀문서에는 ‘무뢰한D’ 라는 서명이 표기되어 있었다. 프랑스 방첩부대는 곧 내사에 착수했고 ‘DREFUS’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유대인이었군” 이로서 드레퓌스에 대한 희생제의가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경험한 프랑스에게는 말 그대로 희생양이 필요했다. 머지않아 그 메모의 진짜 주인공은 다른 프랑스군 장교 에스테라지 임이 밝혀졌지만 이제 싸움은 진실 찾기에 있지 않았다. 이미 대중들에게 인식된 희생제의를 하기 위해 프랑스군은 명확히 무죄였던 드레퓌스를 확실한 ‘진범’으로 만드는 온갖 조작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때, 에밀 졸라는 <나를 고발한다.>를 통해 프랑스 국민들에게 통탄의 메시지를 날렸다. 프랑스 군에서 자행되는 마녀사냥의 배후를 분명히 하고 프랑스의 지성계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곧이어 수많은 지성인들이 드레퓌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이렇게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반(反)드레퓌스 파는 ‘앵텔렉튀엘’이라 불렀으며 이는 ‘지식인’이라는 단어의 원형이 된다. 프랑스 전역을 광란의 분위기로 몰고 갔던 ‘아무 죄 없는’ 드레퓌스는 마녀사냥에서 결국 벗어나지만 다시 군대로 복귀하기를 거부하고, 평범한 일생을 살아갔다. 하지만 프랑스의 지성인들과 전 세계 지성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에밀 졸라 라는 위대한 지성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광신적 파시즘을 이겨낸 프랑스를 존경하게 되었다.
위의 재판들을 통하여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부끄러운 시대는 언제나 희생양을 통해 그 시대를 극복하려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권력은 독재, 부패화 되고, 호도된 민중들은 우매함을 벗어나지 못할 때, 국가는 파탄에 이르지만 늘 깨어있는 지성과 양심들은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는 특징들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최고의 지성들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