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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게 독서하기>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

이시대 2013. 3. 20. 21:22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돌베개, 2005)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표상, 장준하 선생”

1975년 8월 17일, 이날로 예정된 등산 계획은 날씨가 너무 더워 취소될 예정이었다. 16일 약간 늦은 오후에 그는 한통의 전화를 했다. 오래된 지인이자 한때 자신을 도와준 호림 산악회 회장 김용덕은 수화기를 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도 잠시, 김용덕은 내일 등산을 가자고 제안을 했다. 오랜만에 바람을 쐬자는 것 이었다. 원래 내일 등산은 안하려던 생각이었지만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은 그리 험준하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마지막 길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8월 17일 오전, 40여명의 일행이 약사봉 초입에 도착하여 약간의 휴식을 갖는 동안 그는 예전 선거운동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김용환과 함께 약사봉을 오른다. 한참을 지나 함께 동행 했던 김용환은 한 개의 손목시계를 갖고 와 시계의 주인이 사망했음을 알린다. 오후 1시 50분 경, 필자가 진정으로 애국자라고 생각하고 존경하는 장준하 선생은 그렇게 타계했다. 물론 그의 절친한 동지들은 아무도 추락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자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이 사전에는 그 동안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박정희 前 대통령을 친일인사라 명확히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엔 자연스러운 전개였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박정희는 애국을 하기 위해 일본군에 지원한 것이다.”,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 와 같은 상황논리가 펼쳐지면서 자연스럽게 장준하 선생의 삶을 떠올려 보았다. 왜 그가 떠올랐을까.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3.1 운동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은 기독교 목사인 장석인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장준하는 유년시절 ‘브나로드’ 운동 등에 참여하는 등 현실 참여적인 모습을 보인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그해, 일본의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 한 그는 그곳에서 문익환 목사 등을 알게 된다. 43년 일본에서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여 식민지 청년들을 강제징집해가자 그는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후를 모색하자는 생각으로 일본군에 입대하게 된다. 소속됐던 쓰카다 군대가 중국으로 이동하자 기회다 싶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여 하늘 같이 떠받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에 5개월 만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융숭한 대접과는 달리 임시정부는 속부터 곪고 있었다. 당파적 분쟁이 너무나 심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찾아왔건만 선배들이 도무지 나라를 구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임시정부의 상황전개를 보며 청년 장준하는 한국의 암울한 장래를 진정으로 걱정하였다. 그래, 이것이 약소국의 설움일지도 모른다, 견뎌내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좌절만 할 수는 없었다. 일체의 공개가 되지 않은 첩보 훈련(OSS)까지 우수하게 수료한 그는 조국에 돌아가 전쟁을 수행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본토가 핵 타격을 입은 일본의 일방적인 항복은 장준하를 비롯한 독립군들에게는 결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일본은 독립군들의 투쟁에 의해 물러가야만 했다. 이렇게 일본이 패퇴한다면 국내의 정치적 혼란함이 가중될 뿐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제 관계는 한반도의 자주적 역량을 고려치 않았다. 일개 민간인이 되어 고국에 돌아온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남은 진로는 순탄치 않았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쳐 온 김구 주석 역시 정치적 격변기에서 테러를 당해 서거하고 모든 열매를 독차지 한 것은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무언가 잘못돼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한때 너무나도 존경하던 이범석 장군이 그리 위대하지 못한 이승만 밑에서 충성하는 모습을 보며 정치에 대한 회의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청년 장준하는 정치 운동에서 한발 떨어져 진정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1953년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사상계>였다. 사상계를 통해 장준하는 사회의 암적 요소들을 고발하고, 시대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자 한 필생의 작품이었다. 물론 당연히 정권과의 관계는 나빠져만 갔다. 1960년 4.19 혁명의 과정 속에서 혁혁한 역할을 해낸 것도 바로 이 잡지였다. 그 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장준하는 오히려 현재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군부를 바라보지만 머지않아 군부독재의 씨앗을 바라보고 비판자적 입장이 된다. 무엇보다도 일본군의 장교 출신이 게다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공산주의자에서 일본군이 된 박정희의 조변석개(朝變夕改)한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군부가 유신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자 그는 ‘반유신’ 운동의 핵심이 되어 일평생을 부조리에 저항하다 스러지고 만다. 약사봉에서의 우연한 사망은 그만큼 석연치 않은 것이었다.

이상 박경수씨가 지은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을 보며 우리 세대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준하 선생의 삶을 바라보았다. 비록 동시대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정신만큼은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어 계승될 것 같다.

얼마 전 타계한 김수환 추기경은 장준하의 선생의 영결미사에서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보다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일 뿐입니다.”고 했다. 시대가 어려운 지금, 장준하 선생과 같은 보석 같은 분들이 어디선가 빛을 발하고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