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의 view
정도전과 개혁 그리고 새로운 정치
이시대
2013. 4. 3. 00:08
한낮 변방 장수집안, 그것도 몽고의 지방관리인 이자춘의 아들로 태어난 이성계는
용맹하고, 당대에 당해낼만한 장수들이 없을 정도로 싸움에 능하고 리더쉽이 강했다. 몽고의 몰락이 뚜렷해지자 고려로 귀환한 이자춘 집안은 비록 동북면에서의 실력자임에는 분명했지만 고려의 중앙권력 입장에서 보기엔 '촌놈집안'이었다.
이 촌놈들이 아무리 용맹해도, 타고난 가문과 신분을 유지한 중앙정치집단 앞에서는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바로 '사상가' 정도전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박시백은 이 만남을 '무력과 사상의 만남'이라 표현했는데, 근대 사회의 변혁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핵심적으로 표현한 문장이라 생각한다.
일찍이 중앙에서 불온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중앙정계 진출이 불가능했던 정도전은 주로 지방을 돌며, 백성들의 생활상을 직접 관찰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것이 생활이 전부였다. 의례 이런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중앙정치에 대한 불만을 정교하게 다듬을 이론을 구상하게 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정치교육기관 '삼봉재'는 이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기관이었으며, 정도전의 행동대장들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사회에 대한 '정교한' 불만을 잔뜩 간직한 정도전에게 '욕구불만' 변방장수 이성계의 존재는 동질감을 느끼기 충분했으며, 이성계의 무력이 있으면 중앙을 장악하고, '새로운' 사회를 열 수 있기에 충분해보였다.
그렇게 정도전은 이성계의 무력을 빌어 고려의 중앙을 장악했으며, 조선이 세워지기도 전에 개혁프로세스를 집행해 옛 토지대장이 불태워지고 '과전법' 실시 및 조세제도가 개혁됨으로서 최고 수위의 '새로운 정치'를 보여주게 된다. 이는 정도전이 지방을 떠돌며 백성들과 호흡한 경험이 없었다면 관료집단의 저항으로 추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백성들의 폭발지점을 파악했고, 민심의 향방을 읽어 이성계에 보고했고, 이성계는 정도전을 신뢰해 강하게 돌파구를 열어줬다. 개혁은 그렇게 추진되었다.
조선 사회의 굽이굽이를 돌아보면 사회 변화의 깊이는 이 조세제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세제 개혁이 강하면 강할수록 백성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냈고, 조세제도의 방향이 기득권(주로 관료)의 이익에 충실할 때마다 의적 혹은 의병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정도전과 개혁, 그리고 새로운 정치의 삼각함수 위에 우리 사회를 올려놓으면 제법 괜찮은 관점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현재 누구나 이성계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하려 하지만 정도전과 같은 사상가가 없으면 제대로 된 개혁방향을 잡지 못한 채 정치가 소영웅주의에 빠질 수 있으며, 내리 600년 역사 이래 관료집단(지주집단)의 이익과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분산시키는 것을 백성들은-인민들은-민중들은-국민들은 최고의 새정치로 여겼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