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의 view

김육과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시대 2014. 10. 11. 19:59

 

 

 

 

 

역사 속에서 의미있는 인물을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잠시 조선 시기에 매우 드물게 나타난 개혁정치가 김육(1580~1658)의 행적을 좆아보자. 김육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조선 초유의 사태를 거치며, 민생이 어떻게 도탄에 빠졌는지 목도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왜란과 호란에 대처해야 했던 집권층 전부가 같은 계기를 가졌지만 김육이 뛰어난 것은 '자신을 걸고' 개혁의 전면에 나섰다는 점일 것이다.

양란이 있었음에도 조선의 지배계층이 전복되지 못하고, 자기반성 없이 사대부의 공리공론이 다시금 재연되면서 민생을 구제할 주도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잔인한' 이때, 김육은 '대동법'라는 최대의 민생규휼 카드를 들고 나왔다.

양란을 거치면서도 공납의 폐해(방납)가 시정되지 않자, 농민들은 도망가기 일쑤였으며, 그나마 자리잡지 못한 이들은 도적이 되어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당시 이런 문제를 놓고 근원적 처방을 내놓는 것보다 주민 통제를 강화하는 호패법 시행이 대두됐으니, 잔인하다고 표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김육은 호패법 시행이 강하게 논의될 때, 대동법의 전면 시행만이 민생을 달랠 유일한 방도임을 깨닫고는 집권층 내에서 비주류가 되는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김집과 송시열이라는 최고 권위의 정치가들이 김육의 방안을 반대하고 나선것을 볼때 김육이 처한 환경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대동법이 주류 사대부들의 반발을 산 이유는 공물 대신 쌀로 과세하자는 논리가 방납업자와 그와 관계된 집권층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부과기준을 가호가 아닌 토지결수에 두자고 한 것이 훨씬 직접적인 반대의 이유였다. 집을 기준으로 할 경우 부유한 양반이나 가난한 농민이 같은 액수의 세금을 내야 하지만 토지를 기준으로 할 경우 빈부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내는 양이 천지차이가 난다. 이른바 '부자증세'였던 셈이다. 무릇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생각해볼때 김육의 방안은 당시에 실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였던 것이다.

김육의 방안은 반대자들이 막강함에도 불구하고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나 민생을 구제해야할 가장 큰 의무를 지고 있던 광해군, 인조, 효종은 내심 사대부들에 대한 과세를 지지했다. 다만 사림정치가 본격화 된 이 시기 사대부의 이해관계를 국왕이 거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법 시행은 역사의 흐름이었다. 대동법을 일부 시행해본 결과 과거의 공납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효과에 반대자들은 명분을 잃었고, 역설적이게도 송시열이 가장 큰 정치력을 발휘하던 효종 시기에 대동법이 최대 곡창 지대인 전라도까지 확대 실시되었다.

이것은 '자기계급'을 배반한 김육 같은 정치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담배값 인상과 세수확보라는 이슈를 보며 김육이 떠오른 까닭은 보수정권이던 진보정권이던간에 상관없이 세수부족이라는 객관적 현실 때문에 담배값을 올려 세원을 마련하자는 얄팍한 논리에 앞서, '부자증세'라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외치는 정치가가 여당에서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너무 잔인한 것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