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의 view

흥사단 전국청년위원회 성장을 위한 제언

이시대 2015. 5. 25. 16:49

 

 

흥사단 전국청년위원회 성장을 위한 제언.


들어가며.

“위기다” 라는 말은 필자가 흥사단 활동은 시작한 2003년부터 반복되어 왔다. 물론 그 이전부터 메아리치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본부로부터 제츨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대학아카데미의 개수는 12개로서 2003년의 24개에 비해 딱 절반수준 가량으로 떨어졌으니 위기는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형태로 나타난 셈이다. 또한 전국 청년단우의(20세~45세) 총 인원은 1600여명으로 전체 1만 단우의 16%를 이루고 있으니 조직의 하부가 그렇게 튼튼하지 못함도 확인되었다. 고교A, 대학A를 통해 의식적으로 훈련받은 청년세대를 배출하고 이를 단우화시키는 구조 속에서 가장 중요한 고리인 대학A의 침체는 자연스레 흥사단 전반의 활기를 저하시킨다는 측면에서 확실히 “위기는 위기다”

그러나 이 위기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층위는 여러 갈래로 갈린다. 그것은 흥사단 운동을 하는데 있어 주관적인 인생관도 개입되는 것이고, 이 활동을 통해 어떤 성장을 할 것인가 하는 개인적인 전망과도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총의를 모으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따라서 위기에 대응하는 가장 초기의 방법은 각자 개인이 전망하는 것을 풀어내고, 이를 조직의 틀로 묶어내는 ‘별로 신선하지도 새롭지도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우리가 목적하는 바가 단우 개인의 성장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니라 개인들의 조화로움을 거쳐 흥사단 전체 운동에 이바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원회 활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필자는 필자의 흥사단 운동관을 소개하는 것을 일종의 의무로 생각한다.

‘전제된 기본 인식’

흥사단에 소속된 인원들은 필연, ‘도산처럼’을 피해갈 수 없다. 도산의 어록을 금과옥조처럼 여긴다던가, 선생의 인격과 품성을 함양하는 것을 기본자세로 여긴다.

그러나 필자는 이제 그러한 ‘말씀’과 ‘품성’, ‘인격’에 매몰된 ‘도산관’에서 벗어나 도산의 구체적인 실천의 맥락을 놓고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요할 땐 도산의 당시 실천이 정세에 그릇된 것이었으며, 때로는 ‘역행’이 위태로움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스터디 함으로서 도산에 대한 ‘맹목성’에서 탈피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사람의 실천적 행위는 결코 1차원 방정식으로 풀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도산은 물론 당시에도 보기 드문 훌륭한 리더였다. 다만 반대파도 많았다. 실천은 언제나 편향성을 갖기 마련이고, 조직은 늘 배타성을 갖기 때문에 도산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반대파가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흔히 정치적 경쟁자로 알려진 이승만이 보기에 안창호는 ‘서북지방’의 파벌적 지도자로 보일 수 있었고, 급진 변혁을 꾀하던 김일성이 보기에는 고리타분한 ‘부르주아 민족주의 지도자’로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실천이 갖는 편향성과 조직이 갖는 배타성이 결합되어 도산을 그렇게 규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도자가 갖는 언행과 품성은 주변의 인간관계와 구도를 떠나 독립적으로 평가받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우리 조직이 위와 같은 덕목을 지나치게 강조해 ‘금과옥조화’ 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규범적인 내용보다는 도산의 실천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항일독립운동의 지도자는 그렇게 단번에 등장하지 않았다. 유년시절은 서재필의 ‘독립협회’를 통해, 매우 '불순하게'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만민공동회’의 최고 인기 연사였고 이 인기 때문에 내각 수구파의 탄압을 피해 다니기도 해야 했다. 공부를 더해 문명개화와 독립국가의 길을 찾기로 결심한 후에 결행한 미국행에서는 ‘공립협회‘라는 미주 최대의 한인단체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 조직은 독립운동의 최대자금처가 될 만큼 도산의 역할은 눈부신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귀국해서는 신민회의 산파가 되고, 흥사단 운동의 모체가 되는 청년학우회를 조직하는 등, 끊임없는 실천가의 면모를 보였고 이런 실천의 맥락을 바탕으로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취임해, 향후 국가 건설의 방향을 ’공화국‘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조선왕조 600년의 관성이 여전히 작동했던 ’독립운동판‘에서 임시정부가 복벽주의를 청산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이후에도 도산은 끊임없이 실천가, 조직가다운 면모를 보였다. 이런 도산의 행보를 분석한 국내 ‘도산 전문가’인 이명화 교수는 그의 실천을 ‘중도적 정치인’라는 범주에 놓고 해석한 바 있기도 하다.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내면에 따른 여러 실천들이 때로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급진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온건하기도 했던 것이 그에게 ‘경륜’을 불어넣어 줬던 것 아닐까 한다.

따라서 나는 흥사단 운동이 기계적인 도식 위에서의 ‘중립’과 ‘통합’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조건 속에서의 다양한 ‘편향된’ 실천을 통해 우리의 전망을 만들어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도산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청년 조직 역시 사회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서두에 언급했지만 대학 아카데미 조직은 2003년 24개에서 2015년 현재 12개로 줄어들어 있다. 지역별 분포로 봐도 수도권에서 자립하고 있는 아카데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일반적인 사회상과 맞물려 있다.

흔히 아카데미의 양적 팽창기인 1980년대 대학가에서는 대학자율화조치가 단행된 이후 다양한 사상 서클이 급속도로 팽창하게 되는데, 이미 전국대학에서 조직망을 갖고 있던 아카데미는 그야말로 의식의 ‘분화구’ 역할을 했었다. 일부 아카데미를 제외하고는 학생운동권의 ‘반전두환’ 기치를 수용했고, 대중적으로 확산된 학생회에 조직적,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통해 대학 내에서 역할을 확대해나갔고, 훗날 우리 선배들은 이 ‘편향적’ 조직의 양적 확대를 일종의 전성기로 보는 시각이 여전히 강한 향수로서 남아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제 양적확대를 담당할 수 있는 중요한 중심축인 ‘사회상’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조직을 확대할 수 있는 고리를 확보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이는 ‘주장’과 ‘선언’을 통해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는 일반 학생운동, 민중운동 진영과 시민사회운동 진영이 더 이상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함을 볼 때 더욱 뚜렷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회가 의미를 부여하는 조직들은, 하고 있는 일이 ‘구체적이고 분명한’ 단체들이란 점을 끝까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역시 기본으로’

흥사단의 청년기반이 허약해지는 기본 원인이 우리가 쉽게 어찌할 수 없는 사회상에 기인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에 대한 대처를 해야할 일종의 ‘책임’을 안고 있다. 분석을 통한 패배감 확장보다 유능한 실천가 1인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조직가로서의 도산은 ‘흥사단’이 이렇게 대규모로 성장할 수 있을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뿌려놓은 작은 씨앗들이 큰 열매를 맺었을 따름일 것이다. 도산은 그때그때 해야할 일들을 했을 뿐이고, 그것은 일종의 ‘깨어있는 인민들의(당시의 일반적 표현) 조직된 힘’을 만들려함이었을 것이다.

이제 흥사단 전국청년위원회가 출범했다. 30명도 채 되지 않는 인원이지만 그리 우울하게 생각할 이유도 없다. 나는 이 30명이 다양하게 각자의 위치에서 하는 실천들을 취합하고, 이를 용광로처럼 뽑아 청년위원회의 중심과제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 ‘편향된 실천’은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마련한 다양한 실천과제를 해결하려는 청년단우를 먼저 우리 안에서 발견하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방향은 이미 비전선언문을 통해 정리되어 있다. 남은 것은 무실역행하는 우리의 ‘수준’일 것이다.

2015.5.24 전국청년위원장 김동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