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ical view
홍국영과 소년 출세
이시대
2019. 1. 29. 23:28
홍국영과 소년 출세
김동환의 view 2015/01/07 00:36 김동환
홍국영과 소년출세
뒤주에 8일이나 갖혔던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 방식에 있어 매우 경악할 만 했다. 영조가 취했던 이런식의 상황 설정은 신하들에게 있어 죽음을 둘러싼 해석과 이후의 행보를 결정하는데에 있어, 그 온도차이를 매우 심하게 벌려놓았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 일성으로 아버지의 신원을 엄포했을때, 이미 택군현상이 발생한 조선 정계에서 정조를 바라보는 시각이 극단을 달렸을 것이란 추측은 쉽게 가능하다.
하지만 정조는 비교적 집권 초반의 권력누수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는데, 이는 그의 비서실장 아니 특무실장 '홍국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조 역시 이전의 강력한 군주의 권력운용 방식대로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는 외척의 발호를 견제해야했고 노, 소론에 포진된 외척당 홍인한, 정후겸의 영향력을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했다. 그만큼 군주권보단 신권이 강화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눈치가 빠르고 민첩했으며 두뇌회전이 빨라 임기응변이 능했다는 홍국영은 비교적 빠른 시기인 25세에 과거에 합격해 그야말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그에 수반하는 인격적 학문적 깊이가 있다거나 하는 기록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좋아하고, 방탕하게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와 혜경궁 홍씨, 정순왕후와 인척이라는 타고난 가문에서 오는 뱃심도 한 몫 했으리라 추측한다.
여튼 25세에 과거 합격 후 몇개월 뒤 국왕의 측근에서 근무하는 예문관원에 임명되고 또한 왕세손(정조)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아 정조를 수행하는 특임을 맡게된다. 정조는 특정 당파에 물들어있지 않다고 느낀 홍국영을 깊게 신뢰했고, 외척과 반탕평세력의 정조-홍국영 거리벌리기 시도를 끝까지 견디며 옆에 있어준 홍국영에게 동지감을 느꼈다.
결국 영조가 대리청정을 명한지 몇개월 지나 영조가 사망하자, 국왕이 된 정조는 '홍국영을 죽이려한 죄'를 들어 반정조 세력을 제거하고, 홍국영을 왕명을 출납하는 도승지에 임명하면서 그에게 전권을 부여한다.
홍국영은 송시열을 효종의 위패 옆에 추가로 배향하여 노론의 당론을 앞세워 윤선거, 윤증의 뜻을 기리는 소론계에 대한 영향력을 최대한 제거하는 바탕 위에서의 탕평을 추구했고 자기 누이동생을 정조의 측실로 들여보내 정조와 외척관계를 맺었다. 벼슬은 높아져 수어사, 훈련대장 등 5개 군영의 대장을 거치고 실각 직전에는 여전히 도승지 및 훈련대장으로 군권까지 장악했다.
그런 홍국영을 은퇴시킨 것은 정조였다. 정조는 홍국영과 처음 만난 9월 26일 그 날짜에 홍국영으로 하여금 정계은퇴 상소를 올리게했다. 이미 홍국영에게는 왕위계승권에 개입했다는 대역죄가 성립되어가고 있었다. 외척의 발호를 가장 경계했던 정조의 눈에 홍국영은 이미 또 하나의 외척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홍국영은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는 처벌을 받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나마 목숨을 살려준 것은 옛 동지에 대한 정조의 의리였을 것이다.
정계에서 은퇴한 홍국영은 경기도 해변과 동쪽 바다를 오가며 거쳐를 정했는데 매일같이 술로 지새다 몇달만인 다음해 4월 화병을 얻어 33세에 숨을 거둔다. 너무나도 파란만장 했으나 10년이 채 되지 못하는 권력이었고, 역사 역시 별로 그에게 후한 평가를 내리진 않는 것 같다.
아마 그로 인해 세상에서 제일 피해야 할 것으로서 '소년출세' 를 꼽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제 나도 내년에 33세인데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잘 점검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