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발전, 그거 가능하기는 한 건가?”
반세계화 물결이 거세다. 이러한 흐름은 비단 한국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유럽의 선진 국가들에서도 후발주자 국가들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위가 발생할 때마다 맥도날드의 간판은 상징적으로 철거된다. 2005년 한국의 이경해씨는 홍콩에 건너가 자기 목숨을 내놓았다. 모든 종류의 개방논의가 일어날수록 곰비임비 긴장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서민들이다.
반세계화 운동의 핵심적 요구는 전 세계적인 지식, 정보의 생산 및 확장의 프로그래스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세계화 그 안에 숨어있는 핵심요소인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계급의 불평등한 재생산은 부익부 빈익빈을 격화시키고 있다. 그게 문제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굳이 신자유주의라는 생경한 언어를 앞세우지 않아도 자본주의 시스템의 성질은 그 단어가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계급의 불평등성은 예전부터 계속 존재해왔는데 세계화는 그것을 가속화시킨다는 것이다. 강한 명분은 전 세계의 운동가들에게 충분한 활동의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
소싯적 환경운동의 현장에 있었노라고 기억을 주억거리다 보니 이러한 세계화와 환경오염과의 상관관계에 초점을 맞춘 적이 있었다. 환경운동이란 것이 단순히 ‘깨끗해짐’이라는 1차적 과제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면 응당 어떠한 철학을 바탕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세계화라는 게 사실 자본운동의 측면에서 본다면 자국의 산업시설에 대한 해외 이전을 용이하게 하고 그에 상응해 발생하는 오염물질이 전 지구적 규모로 확산되는 면이 있는 것이어서 그 관계가 결코 얕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코펜하겐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회의’에 모든 국가가 초점을 맞추는 까닭 역시 여기에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문화 지방 라다크에서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세계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서구의 자본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개간시설이 세워지고 교통이 발달돼 외지에서의 인구이동이 활발하면 할수록 라다크의 전통 문명이 파괴되고 공동체 정신이 훼손되는 것을 보면서 세계화라는 것은 사실 ‘서구화’라는 보다 명료한 해답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라다크의 사례는 이미 고도로 산업화 된 국가인 한국의 상황과 단순 비교할 성질은 물론 되지 못한다. 외국 자본과 차관으로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며 스러져 간 과거의 공동체 문화를 그리워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 오늘이다. 우리 한국 역시 60전 전의 라다크였을 뿐이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과 라다크에서의 사례가 이러한 세계화 혹은 서구화의 확산의 논리로 언제까지나 사용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 그러한 시기를 거치면서 문명사에서 더욱 중요한 가치는 생태적 공동체 또는 지역적 공동체의 소중함이라는 것이 학습의 결과가 되었다.
세계화라는 것이 지역 물자의 원활한 이동, 지식의 확산, 관광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춰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논리 역시 전부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더 이상의 강요되는 서구화 특히나 그 안의 신자유주의 확산의 목적성은 이미 실체를 드러냈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더 읽어보기
허울분인 세계화(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도서출판 님, 2000)
가비오따스(앨런 와이즈먼, 월간 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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