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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8

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 낯선 이름이지요? *이 글은 6월 1일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 종종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접속해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누가 선정됐는지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6월의 독립운동가'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권오설·이선호·박래원·이동환 선생. 그 공적을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만세 시위로 일어난 학생 중심의 민족 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 인물"로 정의내리고 있다. 1987년 6월 10일에 발생한 6월 항쟁은 널리 알려졌으나 서슬퍼런 조선총독부 통치 시절 1926년의 6월 항쟁은 대체 무엇이길래 민족독립운동이라고 정의한 것일까. 또 권오설은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을 통해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일까. 호기심이 펜을 잡기에 이르렀다. 분명 국가.. 2021. 6. 3.
김재봉과 3.1 운동 김재봉과 3.1 운동김동환의 view 2015/03/21 00:27 김동환 -김재봉과 3.1운동- 나라를 잃었을 때의 슬픔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충격을 딛고 한 발 내딛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과정을 필요로 한다. 외교와 치안을 장악당한 한반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전처럼 소시민적 개인으로 남아있으려면 사실 별로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아픔을 개인적 차원으로만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중심을 공동체로 놓고 구체적 행동을 보이는 순간, 인간은 위대해진다. 강제병탄 이후, 이에 저항하기 위한 흐름은 다양한 갈래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열분에 찬 명망가들은 국내 저항을 포기하고, 해외로 망명을 한다던가, 의병대나 해산당한 군인들은 전선을 만주 이.. 2019. 1. 29.
김재봉과 3.1 운동 -김재봉과 3.1운동- 나라를 잃었을 때의 슬픔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충격을 딛고 한 발 내딛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과정을 필요로 한다. 외교와 치안을 장악당한 한반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전처럼 소시민적 개인으로 남아있으려면 사실 별로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아픔을 개인적 차원으로만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중심을 공동체로 놓고 구체적 행동을 보이는 순간, 인간은 위대해진다. 강제병탄 이후, 이에 저항하기 위한 흐름은 다양한 갈래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열분에 찬 명망가들은 국내 저항을 포기하고, 해외로 망명을 한다던가, 의병대나 해산당한 군인들은 전선을 만주 이북으로 후퇴하여 '산사람'이 되는 것이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2015. 3. 2.
정파갈등의 역사성 ‪#‎1919년‬ 9월 한성정부, 블라디보스톡의 임시정부와의 통합으로 주요 각 정파가 총 망라되었던 상해임시정부는 채 2년을 가지 못하고 분열되고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결의와 탄핵이 추진되면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협성회와 반대하는 군사통일촉성회가 개최되었는가 하면 모스크바에서 임시정부로 보내던 정치자금이 배달사고가 나면서 내적으로 갈등이 심해지는 상황이 생겼다. 비슷한 시점에 간도에서는 훈춘사건, 자유시참변이 발생하면서 상해에 위치한 임시정부의 기능이 한계가 드러나 정부의 간도 이전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국민대표자대회'는 이런 내외적 갈등을 수습하고, 통합정부로서의 위상을 재구축하기 위해 1923년 1월 3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각계대표 124명이 모여 성립되었다. 최대의 독립운동.. 2014. 10. 11.
6.10 만세운동의 중요성 오늘이 6월 10일이라 그런지 sns상에 6.10이야기가 많이 올라옵니다. 6월 항쟁을 승리적으로 끝내고 탄생된 그 놈의 6월 체제가 뭔지, 이젠 6월 체제를 극복해야한다는 주장도 많긴 한데 꽤 크게 공감되는 것은 국회의원의 정수를 확대하자는 주장입니다. 1987년에서 아마 의원정족수가 한명 증가해 현재는 300명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그간 인구가 얼마나 증가했으며, 사회의 각 영역이 얼마나 세분화되어 있는데 지금의 대의구조를 갖느냐는 것이죠. 비례대표제의 확장도 이 의원정족수 증가와 맞물려 계속해서 논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튼 다들 이 87년의 6.10을 이야기 하는데, 저는 훨씬 더 과거의 6.10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26년 4월 25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 2014. 6. 13.
<희망을 주는 책 소개> 조봉암과 진보당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한 민주사회주의자. 조선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배신자'의 진로를 그렸던, 하지만 누구보다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조봉암은 그러나 대선에서의 놀라운 득표율로 인해 이승만의 경계심을 발동, 결국 사법살인을 당해야 했던 비운의 정치가다. 어린시절부터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른 공산주의자의 진로와는 달리 이승만 정권의 내각에서 일했던 그가 공산주의 운동을 포기한 대신 내세운 것은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이었다. 비록 그것이 명확히 의미하는 바는 사실 불투명하지만(유럽의 사민주의 노선? 그 당시 존재했나모르겠다.) 혁신계열의 하나로 본다면 그럭저럭 이해가 가능하겠다. 이승만 내각에 참여해 장관으로 재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과 대결하기 위해 나섰던 조봉암은 당시 야당.. 2013.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