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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처절하게 독서하기>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

by 이시대 2013. 2. 26.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사이토 사쿠지, 가람기획, 1996)

"진정한 한, 일 관계의 평화를 기원한다."

1945년 8월 24일 오후 1시, 송종호(가명)는 배의 갑판 위에 올라서서 쏟아지는 햇빛을 쬐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포근한 감각이다. 어제 새벽 배 안 침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이리저리 사람들이 시루떡처럼 뭉쳐져 있어 출렁이는 파도에 따라 사람의 몸무게가 그대로 덮쳐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늦잠이 들었던 그는 선박의 차창에 비치는 빛줄기로 인해 눈을 떠 갑판으로 향했다. 그는 갑판에서 지긋히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1939년 여름, 한참 농사일에 바쁠 때, 일본인 순사들이 찾아와 다짜고짜 연행에 갔다. 얼마 전 술에 취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옆집 김씨와 막걸리를 마시며 일제의 수탈이 너무 심하다고 한 짧은 말이 그들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젊은 사람들이 모여 소란스럽게 항의하고 있었다. 나에게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다는 안도에 한숨 쉬고 있을 때, 일본인 순사는 서류를 간단하게 작성하더니 모두를 일본 육군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몇일동안 쉴 새없이 온 이곳은? 밖을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앞에 총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는 군인들이 두려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동안 기차를 타고 배도 탔다. 중간에 배 멀미가 심해져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군인들이 봉투를 던져주기에 어쩔 수 없이 급한 김에 일을 처리했다.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하는 것도 잠시, 그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트럭으로 갈아탔다. 그나마 배멀미에서 해방되니 살 것 같았다. 덜컹거리는 트럭에 탄 지 한시간이나 지났을까? 그들을 후송해온 이들은 차에서 내려 총을 어깨에 메고 부랴부랴 한국인들한테 내리라고 손짓했다. 말을 잘 안듣는 사람들한테는 개머리판을 휘둘러댔다.


그들이 내린 곳은 나무와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그리고 저 앞에 하나의 조그만 막사가 보였다. 그들 앞에서 양복을 점잖게 빼입은 한 사내는 양쪽에 소총을 메고 있는 일본 군인들 사이에서 한국인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고, 이런저런 보상에 대해서도 지껄였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속으로 "속았다." 라고도 했고, "나를 왜 끌고 왔지?" 혹은 욕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은 오는 도중 한 청년이 저항하다 두들겨 맞아 반신불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부터 호된 노동이 시작되었다. 산의 나무를 자르고 구멍을 뚫어 터널을 만들었다. 육중한 무게의 철근을 하루에도 수십개나 날랐기 때문에 한국인 그 누구도 기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조금만 쉬려고 하면 채찍이 날아들었다. 인간노예 그 자체인 것이다. 송종호는 하루는 너무나도 목이 말라 일하던 도중 냇가에 뛰어들어 머리를 쳐박고 꿀걱꿀걱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등 뒤로 채찍이 날아오기 시작했고, 기절한 그는 눈을 떠보니 막사 한 구석에서 쓰러져 있었다. 너무나도 서러웠다. 내가 왜 이곳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가.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마누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 다시 일을 나간 그는 엊그제 그 냇가의 윗쪽에서 한 한국인 늙은이가 일을하다 매맞아 죽어 둥둥 떠있었으나 아무도 건져주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을 타꼬(빠져나갈 곳 없는문어가 굶주리면 자기 다리를 뜯어 먹는다는 데서 생겨난 말, 미리 계약금을 받고 온 노동자들은 이자로 인해 원금을 상환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라고 불렀고 모여있는 집을 타꼬방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고 있던 것이 '오마 철도'로서 일본 해군의 군사적인 목적으로 쓰이기 위한 것도 훗날 알게 되었다.


송종호를 포함해 수 많은 사람들이 새벽 몰래 철창으로 뒤덮인 타고방을 빠져나와 도주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내 흠씬 두들겨 맞고 다시 일터로 향해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이대로 살아돌아가리라는 희망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눈에는 초점을 잃었으며 매타작도 익숙해졌다. 간간히 마을 사람들을 보면 집안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했으나 이내 접어야 했다. 그날 저녁 그는 작업장에서 몰래 훔쳐 온 쇳조각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것을 곧바로 발견한 일본인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지고 몇일동안을 끙끙 알며 시름하였다.


1945년 8월 23일, 병원에 입원한 몇일 뒤 자신이 속해있던 타고방의 책임자가 찾아와 이제 모든 일은 끊났으니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과 함께 지난번과는 다르게 친절한 얼굴로 배들이 정박한 항구까지 안내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가 탄 배 이름은 '우키시마호'였다. 올때와 같이 사람들로 북졌였다. 송종호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지나간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난 무엇을 했던 것일까. 간간히 일본 해병들의 다툼이 들려왔다. "난 이 배에 타기를 거부한다." 상관으로 보이는 이는 냅다 따귀를 갈기며 억지로 자신의 부하를 승선시켰다. 그렇게 오미나토항을 출발한 '우키시마호'는 지친 기색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1945년 8월 24일 오후 3시경, 우키시마호 갑판위에서 서 있던 송종호는 문득 젖었던 일본에서의 생활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창고같은 침실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다. 잠에서 깬 그는 놀라서 갑판으로 향했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다시 폭발음이 들리며 배의 정중앙이 두동강 나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 살려달라는 아우성 속에 그는 최대한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배는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고, 송종호는 몇번의 격렬한 외침을 내뱉고, 서서히 물 속으로 잠겨들어갔다.


1945년 8월 24일, 일본의 마이즈루 항에 입항 하려던 우키시마호는 그렇게 엄청난 비극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이날 침몰 사건으로 일본의 공식 기록은 한국인 사망자 524명, 일본 해군 26명으로 나타냈으나 이 기록에 대해선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 당시 선박의 수속절차가 날림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아 최소 한국인 사망자가 2000명은 넘지 않냐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구체적인 피해와 피해인명 그리고 후속대책은 없었다. 그리고 이날의 사건은 완전히 잊혀진 역사가 되었다. 우리는 흔히 지나간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 역사는 '인지'하고 있을 때의 역사지,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은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을 기억해내기란 쉽지 않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전국 생존자 합동증언대회, 1995)



그렇다면 송종호는 왜 일본의 오마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나섰으며, 왜 대다수 한국인 강제 징용자가 탑승한 우키시마호는 침몰했는가. 1939년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위해 군국주의의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비대해진 군부는 한반도를 병참화시키기로 결정하고, 한국인들을 대상으로한 강제징용에 앞장섰다.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의거 '국민징용령'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한국인 동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방법은 회유, 강압, 고문에 의한 것으로서 이들 중 상당 수는 일본의 본토로 들어가 강제 징용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 말엽 일본 사회는 패전의 두려움으로 집단적 히스테리를 불러왔다. 한국인들에 대해 소련의 스파이, 사회 불안정 요소로 보고 집단 학살을 이곳 저곳에서 벌여나갔다. 미시스카 학살사건과 미즈호 학살사건 역시 이 때의 일이다. 패전 이후 한국인들을 우키시마호로 몰아 침몰시킨 것은 그러한 불안감들이 반영된 결과였다.


우키시마호의 침몰요인으로 보이는 촉뢰설은 일본군 및 미국군이 전쟁에 대비한 해상 지뢰가 터져 오키시마호가 침몰했다는 것이지만 이는 일본의 책임범위를 최소화 하기 위한 의도로서 해석되고 몇 년후 인양한 배의 폭발 지점이 촉뢰설에 의한 '밖에서 안으로' 가 아닌 '안에 밖으로' 였으므로 선박 안에 있는 일본 해군에 의한 자폭설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 게다가 사건 발발 직전 일본 군인들은 이미 소형 보트를 통해 우키시마호를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증언으로 볼 때, 사실상 일본 해군이 저지른 만행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이토 사쿠지가 편저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진상'은 우리에게 잊혀져 버린 역사를 기억해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일제 침략이 나은 또 다른 슬픈 역사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으며 일본 정부는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정권교체를 해낸 일본이 한, 일 양국 간의 역사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진정으로 화해하고자 한다면 잊혀져 버린 역사에 대해 최소한의 성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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