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동환의 view

새정치와 중도통합론

by 이시대 2014. 3. 10.

 

 

1986년 12월 24일

1. 지방자치제 실시, 공정한 선거
2. 언론 및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3. 공무원의 정치중립 확보
4. 2개 이상의 정당제도 정착
5. 용공분자를 제외한 구속자 석방

을 수용하면, 정부여당의 내각제 개헌안을 수용할 용의가 있다는 신민당 이민우 총재의 선언으로, 신민당 내부가 발칵 뒤짚혔다. 직선제 개헌을 당론으로 채택하던 당의 총재가 내각제를 긍정하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서 내부의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마치 4.19혁명 이후 허정과 같은 과도적이고 관리적인 인사를 대표로 내세워, 시간을 벌려고 한 김대중과 김영삼은 이민우의 발언이 여권의 공작정치의 소산으로 보고 강경하게 대처하려 했으나 이민우는 당내 비주류이자 평소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던 이철승계의 지원을 받아 분명한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직선제 도입과 내각제 도입을 중심으로 한 신민당 내부의 구도를 조금 더 살펴보면 재밌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김대중과 김영삼은 그간 첨예하게 박정희 정권과의 대립을 통해 리더십을 확보했기에 비타협적인 선명 야당으로서의 신민당을 구축하려 하였고, 이민우를 지원했던 이철승은 대표적인 '중도통합론자' 였다.

여기서 등장하는 '중도통합론'이라는 단어에 조금 더 주목해보자.
이른바 '진산체제' 로 명명되기까지 한 71년의 신민당은 박정희 정권에 타협적이었으며, 야당으로서의 선명성이 상실되어있었다. 바로 당 총재에 취임한 유진산의 타협노선 때문이었는데, 결국 이런 타협노선에 반발한 이들이 40대 기수론의 싹을 틔운만큼, 야당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선명성이었다. 유진산은 자신의 정치철학을 '중도통합론' 이라 일컬었고, 이 중도통합론은 십수년이 지나서도 야당의 일부를 형성해 86년의 신민당 내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 구체적 발현이 내각제 지지였던 것이다.

중도통합론은 그 동안 '참여하의 개혁' 이라던가, '민생우선', '중도층 공략' 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는 대부분 여당에 우선순위를 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86년의 신민당 역시 내분을 극복하지 못해 분당하게 됐고, 의원들의 대부분이 김대중과 김영삼을 따라 통일민주당을 창당함으로서, 야권 내 '중도통합론'은 심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지금도 등장하고 있는 '중도통합론'은 겉은 포용력있어 보이나 타협주의 혹은 보신주의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최근까지도 민주당 내부에서 언급되는 '중도통합'은 과연 그 예전의 '중도통합'과 다를까? 이런 단어가 대선패배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나온 전략일까? 잘보면 안다. 의석수와 상관없이, 형세와 상관없이 그런 얘기를 한 사람은 과거에도 그런 말을 했고, 행동도 그리했단 사실이다. 지금 민주당이나 새정치신당이 빠져있는 공통적인 덫은 바로 '중도통합' 아닐까?

 

 

'김동환의 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2주간의 유세  (0) 2014.03.13
흥선대원군의 삶  (0) 2014.03.10
의열단원들의 삶처럼  (0) 2014.03.09
통합신당 추진, 환영할 일이다  (0) 2014.03.05
10.4선언을 기념한다  (0) 2013.10.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