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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view

비운의 민족주의자 최능진

by 이시대 2019. 1. 29.

비운의 민족주의자 최능진

김동환의 view 2015/02/23 00:29 김동환



-비운의 민족주의자 최능진-

여기 최능진이란 인물을 한번 살펴보자.
가끔은 서로 대립되는 두 인물을 동시에 조명하면 그 시대에 대한 사회상을 획득할 수 있기도 하다.

최능진은 1899년 평남에서 태어나 37년부터 평안도 운동계의 거두 도산 안창호와 함께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며, 조직사건으로 2년의 옥고를 치룬 후 해방 직후 조만식과 함께 평남 건국준비위위원회에서 치안부장으로 활동하다 소련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후 미군정 경찰관료로 취직한 보기 드문 이력의 소유자다.

건준-월남-미군정 하 경찰관료는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조합이지만 추측건데 안창호와 조병옥의 관계 혹은 조병옥과 조만식의 관계망 속에서 최능진이 위치했던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안창호, 조만식, 조병옥의 관계망 속에 있었다는 것은 한국사회가 말하는 소위 '민족주의자'로서의 요건은 비교적 두루 갖춘 셈이다.

최능진이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48년 5.10 총선에서 이승만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위해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미군정 하 경찰조직이 기존의 친일경찰 구조를 그대로 계승하자 이에 격분하여 사표를 낸 최능진은 '인민'들에게 이승만의 약점을 그대로 파고들 수 있는 제법 괜찮은 후보였으나 무투표 당선을 위한 이승만의 공작으로 결국 후보직을 사퇴하게 된다.

그의 이승만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는데 가장 압권은 대통령이 되려는 이승만에 대항해 한때는 이승만의 스승이자 동지였던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 것이다. 담력이 보통이 아닌 셈이었다.

결국 이승만으로서는 인내의 임계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여순사건을 기점으로 "국군 내 혁명의용군을 조직해 구데타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최능진을 구속시키는데, 놀랍게도 혁명의용군의 수괴를 김구까지 설정하려 했다.

결국 한국 전쟁 발발 후 인민군 치하에서 정전운동을 벌인 혐의로 최능진은 1951년 전격 처형되고야 마는데, 그걸 주도하며 웃고 있던 사람은 바로 이승만의 심복이자 악질 중의 악질이라 불리웠던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이었다.



역사는 최능진에게 장준하의 길을 미리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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