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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view

김일성의 귀국과 조선공작단

by 이시대 2019. 1. 29.

김일성의 귀국과 조선공작단


1937년 6월 4일, 압록강 변 작은 시골도시를 습격한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의 90여명의 대원들은 압록강을 건너 대안으로 이동해 밀림에 잠복하고 있었다. 이들은 곧장 대원을 습격대, 진공대, 방위대 등의 6개 대오로 나눠 시골의 주재소를 습격하루예정이었다. 그리고 습격대는 주재소의 총기고에서 무기습득에는 성공하나 5명의 경관은 도주하는 바람에 군사작전으로서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보천보 전투'다.

90명이나 되는 부대가 국경에 침입해 일본 주재소를 습격했다는 사실에 일제도 경악했지만, 그것보다 허술한 수비로 인해 조선인 '김일성'에게 영웅신화를 안겨주는 여론 공작에 이용 당했다는 점이 더 분했을 수도 있겠다. (물론 이것은 훗날의 결과다)

이것이 여론전의 성격이 강했다면, 1940년 3월 11일에 김일성부대는 화룡현에 있는 일본인 목재소를 공격하고 다량의 식량과 총탄을 탈취하는데 성공하는데, 김일성이 떴다하면 광분하던 마에다 다게이찌 경정의 추격부대(마에다 중대) 140여명 중 마에다를 포함한 120여명을 퇴각 중에 사살한다. 아마 김일성부대의 군사 성과로는 가장 규모가 컸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항일 전쟁도 더 이상 효과적으로 전개될 수 없었다. 국내에서도 그렇듯 일제의 경찰력, 군사력은 저항하는 이들을 압도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1940년 말 소련령으로의 퇴각은 그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조치였다.

전까지는 중국인 사령관 주보중의 휘하에 구성된 부대였다면, 이제 그들은 소련군대의 계급장을 달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일소중립조약으로 더 이상 만주와 소련의 국경을 넘나들 수 없는 이들로서는 남아있는 만주 게릴라부대와의 정보망이 끊긴채 긴장이 다소 풀린 생활을 했을 터이다.

좀 더 주의를 끄는 부분은 이들의 시선이 이제 국내로 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전에 언급했 듯, 무장부대를 가진 독립운동 집단은 미일개전과 같은 군사적 급변을 통해, 자신의 군사력을 연합국으로부터 승인받고 참전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전략으로 여겼다. 중경임시정부 광복군의 oss참여 역시 그런 맥락이었다면, 소련에 위치한 김일성 부대로서는 소련의 군사적 동향 역시 무척 중요했을 것이다.

조선공작단은 그런 전략적 인식의 산물이었다. 45년 7월 소련의 대일전쟁 예상에 따른 요원파견 요청이 있자 항일연군 지도자 주보중과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연장자이자 지도자인 최용건이 항일연군의 대원을 만주와 조선으로 파견할 것을 결의하였다.

조선으로 가는 공작대는 평양(김일성, 김현),
사리원(임춘추), 개성(리영호), 신의주(김일),
안주(오진우), 강계(최현), 청진(안길), 함흥(김책) 등 50여명의 대원이 편성됐다.

이들의 공작결정은 역시 훗날의 결과로 드러나지만 그들의 삶을 결정하는데 있어 대단히 큰 영향을 끼친다. 이들이 무명인데 반해, 당시 국내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공산주의 거물 지도자들은 전부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그 활동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조선공작단으로서는 서울의 그들을 상대하는데 비해, 양심적 민족지도자 조만식이나 북반부를 책임지는 국내파 공산주의자지만 별반 조직력이 없어보이는 오기섭, 김용범 그룹을 상대하는게 훨씬 쉬었을 것이다. 그들에 비해서는 중국 연안에서 귀국한 독립동맹 그룹이 훨씬 까다로웠음은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조선공작단은 그렇게 북한의 중앙과 지역에서 활동한 결과, 자신들의 역량 이상의 것들을 얻어냈다. 소련의 지원은 그것을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만주에서 시작한 이 결속력이 강했던 그룹은 채 100명이 안되는 인원으로 북한의 최상층을 장악했던 것이다.

1945년 9월 19일 푸카쵸프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귀국하던 김일성의 머릿 속엔 이런 셈법들이 전부 들어있었던 것일까? 나는 별로 동의하진 않는다. 역사의 대부분의 결과들은 우연의 상황이 겹겹이 겹쳐 하나의 구체적인 상을 내놓을 뿐이다. 운명은 1.여론을 만들 줄 알고, 2. 전쟁에 대한 경험이 있으며, 3. 정치력이 좋았던 그룹에 대해 조금 더 손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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