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김육이다!
김동환의 view 2014/12/05 00:28 김동환
약초 캐러 구름 뚫고 산 올라갔고
낚시한 뒤 달빛 안고 돌아왔었지.
나무하는 늙은이나 농사꾼들과
세월이 오래됨에 사귐 깊었고
가을 서리 내리면 추수 서둘고
봄비가 내릴 적엔 밭을 갈았지.
기묘사화에 연루된 집안의 내력으로 인해 명문가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밑바닥 생활을 해야했던 김육은 잠곡으로 내려가 일반 서민의 생활을 '동지적' 입장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낚시한 뒤 달빛 안고 돌아왔었지.
나무하는 늙은이나 농사꾼들과
세월이 오래됨에 사귐 깊었고
가을 서리 내리면 추수 서둘고
봄비가 내릴 적엔 밭을 갈았지.
그의 호가 잠곡이듯 잠곡에서의 생활은 김육의 정치를 결정하는데 매우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대충 짓고 대충 갖춘 초가집에서 산에서 나무하여 숯을 굽고, 그것을 서울에 내다 팔아 생활했다.
잠곡에서 그는 진실되게 평민이었다. 공리공론과 관념의 영역에 있는 민생이 아닌 눈 앞에 살아숨쉬는 민생의 현장에서 지내본 현장가였던 것이다. 조선을 대개혁의 방향으로 이끈 정도전 역시 현장을 잘 알았던 만큼, 평민 속에 들어가 그들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했던 것은 그것이 자발적 의지였던 아니던 정치가가 되기 위한 훌륭한 토대였던 것이다.
이 경험이 있기에 김육은 대동법을 끝까지 밀어붙인 내적 동력을 마련할 수 있었다. 유언마저 대동법의 완성을 주문할만큼 그는 그의 역할에 대한 신념이 강했고, 김집이라는 거대한 반대자가 있음에도 효종을 직접 움직이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런 김육이 있었기에 대동법은 결국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시대는 그의 행적을 기억해 지금까지 추앙해오고 있다.
오로지 권력을 위한 다툼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그 권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고민하는 태도를 견지하자.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을 했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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