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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인터뷰

<무도>가 만난 안창호, 우린 그를 너무 모른다

by 이시대 2020. 5. 10.

MBC <무한도전>팀이 8.15광복절 특집을 앞두고 미국의 대한인국민회를 찾았다고 한다. 방영분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지만 대한인국민회의 방문은 자연히 광복절에 맞춰 도산 안창호 선생(아래 안창호)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기획되었을 것이다.

많이들 모르는 사실이지만 미국 리버사이드 시청사 앞 도로에는 동상이 3개가 있는데,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미국의 마틴 루터킹 그리고 안창호의 동상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 교민들 사이에서 대한인국민회와 안창호의 역사는 그렇게 현재에도 의미가 깊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서는 미주사회와 같은 실제적 위상보다 막연한 '스승'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치열한 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번도 물러나지 않았음에도 김구, 이승만, 여운형, 김규식, 신익희, 김원봉, 김두봉, 김일성 등에 비해 해방 이후 한국 근현대 역사에 미친 영향력이 작게 느껴지기도 한다.

안창호가 덜 주목받는 이유

 

 


그도 그럴 것이 안창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1938년 서거하면서 1945년 해방정국이라는 정치적으로 '억압보다는 개방적인'(지하활동에 전념하던 조선공산당 역시 해방 직후 '장안파 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수 있었을 만큼) 대중공간에서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었다. 이 공간은 위에서 언급한 김구, 이승만, 여운형 등 그간 '정파의 지도자'들이 경쟁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하고 국가의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는 공간임에도 안창호에겐 주어질 수 없는 공간이었다.

지금에야 국민들에게 지도자로서의 인식이 강렬하지만 김구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초하고 들어가 1926년 국무령 자리에 오르지만 이 시기는 1922년 이후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 고수파로 완전히 갈려 고수파 중심의, 부분적 정부 기능을 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1931년 윤봉길 의거에 와서야 지도자로서의 명망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1945년 8월 임시정부 주석으로 환국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그에 비하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이력은 훨씬 못한 편이다. 상해임시정부를 포함하여 7개에 달하는 각지의 임시정부에서 모두 수반에 추대되었을 만큼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의 명망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높은 편이었지만, 1925년 상해임시정부 수반에서 탄핵당하고 근 20년 가까이 무명의 삶을 살다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42년 미국에서의 항일단파방송을 통해서였다. 여운형 선생 역시 1945년 '조선건국동맹'을 통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위상을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1945년의 정치경험이 정파의 지도자를 국가의 지도자로 격상시키고 후대들은 지금도 그때 그 시기와 인물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노선 '논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안창호는 이 명단에서 빠져 있기 때문에 그 거대한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해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스승'으로 치환돼 적당한 존경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1945년의 정치경험이 없다하여 안창호에 대한 해석을 그렇게 간단히 끝내서는 안 된다. 위의 나열된 인사들 모두 안창호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그들 누구도 동시대에 활동했던 안창호의 권위와 리더십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가장 크게 주목하는 것은 조직가로서의 면모가 누구보다 출중하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모르는 안창호


안창호는 1902년 개화파의 입장을 강하게 피력한 독립협회 활동을 마치고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내 동포들의 비참한 삶을 목도했다. 이후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이 공립협회를 미주 전국조직으로 격상시키려 한 노력 끝에 1909년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될 수 있었다. 이 대한인국민회는 미주 동포들의 삶의 질 향상 이외에도 상해 임시정부에 막대한 재정지원을 하는 공급처가 되기도 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자금이 빈약한 정치조직에 자금 공급처가 가지는 위상은 어땠을까?

대한인국민회 창립보다 조금 앞선 1907년에는 4년 3개월 만에 귀국하여 강연과 연설 등을 통해 만난 이들을 중심으로 '신민회'를 창립하고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략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도 불리는 신민회 조직사건은 국내 독립운동 세력이 일제에 의해 일망타진된 비극의 역사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중심세력은 상당수 피신해 독립운동의 해외기지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그 결실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수립까지 이어진다.

또한 신민회 창립이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그간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정치사상적으로 일정부분 영향을 행사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근대 공화국 건설을 독립운동의 중심 사상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안창호 연보를 보고 있자면 일을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으며 그 종류도 다양하다. 독립협회에서는 유능한 청년 연설가였고, 리버사이드에서는 감귤 농장 노동자, 공립협회 실무자로 일하고, 신민회에서는 조직가 역할과 동시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자를 하는 등 그 범위가 광범위하지만 그 중심을 관통하는 것은 언제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한 '그 무엇'을 하는 것이었다.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흥사단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역할은 그간의 경험과 관록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내무총장으로 선임되고,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세력을 상해에 결집시키려는 노력을 한 결과,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으로 구성되는 개각을 수립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는 미국, 중국, 러시아 영역을 각각 근거지로 하는 독립운동 리더들의 총합이자, 외교주의, 군사주의, 보수 및 진보주의가 결합된 '통합임시정부'로서, 대한민국은 바로 이 '통합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1921년에 가서 통합임시정부가 분열상을 드러내고 무너지는 '실패'를 겪게 되는데, 안창호만은 이 '통합주의'를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고수하게 된다. 통합을 이야기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권위가 달라지게 마련이지만 안창호의 통합은 한마디로 씨알이 먹힐 만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가끔은 독립운동 세력 간 관계의 긴밀함보다 노선상의 선명함이 우선할 때가 있지만 상황을 관철하는 것은 대개 인물의 권위에 있기 마련인 까닭이다.

사상과 노선의 차이가 있는 이동휘와 신채호, 여운형, 신규식 등도 안창호와는 줄곧 독립운동을 논의했으며, 향후 중국내에서 소장 인사로 급부상하는 김원봉 역시 안창호에게는 예의를 갖췄다. 포기하거나 좌절할 만한 상황에서도 정부 강화를 위한 '민족유일당' 운동을 만주까지 가서 전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누구나 경외감이 들지 않을까.

1945년에 그가 살아있었다면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에 걸친 많은 내용을 다 소개할 순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안창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직 기반을 만들어나가면서 투쟁했던 보기 드문 인사다. 이는 단순히 비분강개 뿐 다른 애국적 실천을 모색하지 않았던 일단의 지식인들과도 비교되고, 개인의 목숨까지 희생하면서 숭고하게 투쟁했던 의혈투쟁과도 다른 맥락을 지닌다. 안창호는 이미 신민회 시절부터 독립을 위한 방략을 '전쟁을 위한 군대양성'으로 상정했을 만큼 세상의 변화를 조직적인 기반 위에서 달성하려고 했다.

그래서일까. 적어도 45년 해방정국에서 그가 있었더라면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 권위와 리더십으로 분열적인 정치상황을 타개하는 데 앞장서지 않았을까. 그의 조직적인 역량이 통합을 강제하는 방향으로 나가진 않았을까. 아무리 미군정이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고 좌우 극단의 대치가 계속 되도 안창호라면 이승만과는 다른 '그 무언가'를 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무한도전>의 대한인국민회 방문이 문득 이런 생각까지 다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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