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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처절하게 독서하기> 조용수와 민족일보

by 이시대 2013. 3. 20.

 

 

 

조용수와 民族日報(원희복, 새누리, 2004)

“언론인 수난의 비극, 조용수를 배우다.”


2008년 1월 16일 이목을 끄는 판결이 있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는 1961년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21일 형이 집행된 전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에게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로서 47년에 걸친 유족들의 길고 긴 싸움, 그리고 그에게 씌어졌던 불명예가 1차적으로 씻겨 내렸다.

냉전의 땅에서 오로지 분단된 조국에 대한 아쉬움과 4.19 혁명 공간을 통일을 위한 기반으로 삼으려 했던 젊은 청년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비정했다. 어디 그 뿐 만인가. 분단이 던져 준 절망감 앞에서 좌절했던 것은 이 땅의 양심세력 전체였다. 4.19 혁명이 ‘미완’ 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것은 4.19로 모아진 국민의 기대를 장면 정권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이승만 정권과 같은 정치질서로 회귀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4.19 란 공간은 계속되는 독재에 대한 저항과 그 동안 국가 지도층을 차지했던 일부 친일 반민족 정치가들에 대한 저항을 통해 새로운 사회 건설을 꿈꿀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장면 정권이 4.19를 추수한 것은 ‘정권창출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 만이라는 것이 머지않아 드러났기 때문이다. 때문에 민주당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단순히 반(反) 이승만에 대한 저항의식이었지 저항 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혁신’과 ‘통일’에 대한 열망에 대해서는 과감히 차단하였다. 여전히 국시는 ‘반공’이었기 때문이다.

조용수는 1930년에 태어나 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 정경학부 2학년에 편입한다. 일본사회의 동포들 역시 분단의 상흔에 따른 대립으로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조총련’ 계열과 남한 정권을 지지하면서도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해나갔던 ‘민단’으로 나뉘어져 각기 활동하고 있었다. 어릴 시절부터 민족의식을 품어왔던 조용수는 한국거류민단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의식을 키워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재일한국인 북송반대에 앞장서는 모습과 59년 진보세력의 집권 가능성을 보여줬던 죽산 조봉암이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형구형에 이르자 구명 활동을 펼쳤던 것으로 비춰 보건데 조용수의 기본적인 정치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다.

당시 그가 보기에 조국은 60년 4.19로 일어난 혁명의 공간을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이 획득하지 못하고 보수야당으로 수렴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4.19 혁명의 주도 세력, 즉 혁신세력의 단합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여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청송에서 출마해 낙선하였으나, 이듬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중앙 준비위원으로 참여하면서 혁신세력의 단합을 기한다. 또한 많은 사람의 의지를 모아 <민족일보>를 창간하여 혁신세력의 여론을 모으고, 단합을 꾀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늘 그런 사람들을 ‘위험시’하는 사회였다. 당장 장면정부는 이러한 혁신계열의 흐름에, 특히나 <민족일보>의 활동에 민감하였고, 민족일보를 후원하는 이영근을 조총련의 자금을 끌어당기는 사람으로 보고 내사를 지시했다. 조용수 사장이 처형된 것은 박정희 군부 들어와서의 일이지만 장면정부에서 꾸준히 내사를 하였던 점과 서울신문을 통해 발간정지 작업을 하는 등 계속된 압박을 했던 점은 조용수 처형과 무관하지 않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민족일보>의 장면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늘 반복되어 온 패턴인 것이다.

 

 

1960년 5.16이 일어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신적인 정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러한 기대로 조용수 및 민족일보는 박정희 군부에 대한 기대를 일정정도 가졌는데 그러한 기대는 5.16 후 첫 번째로 자신이 체포됨에 따라 산산이 부서졌다. 조용수에게 가해진 혐의는 평화통일, 남, 북 협상 등 반국가단체인 북한괴뢰정부에 이익이 되는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평화나 통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시대적 가치가 아닌 간첩활동이라는 것이다. 조용수에게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언론인에 대한 사형 구형은 유례없는 일로서 이 일은 권력에 의해 표현의 자유를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다는 한국 언론탄압의 역사 1호가 되었다. 세계 유수의 언론사들은 이 소식을 개탄하고 조용수에 대한 구명운동을 시작하였지만 끝내 61년 12월 21일 형이 집행되었다. 이로서 혁신세력 뿐 만이 아닌 모든 정치세력들에게 군부의 막강함이 확인되면서 ‘고요한 시대’가 막을 열게 된다.

『조용수와 民族日報』는 잊혀 간 시대의 인물, 그것도 가장 비극의 삶을 산 한 청년을 조명하고 있다. 조용수는 1997년 사형구형 당시 판결에 참여한 대선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의 연관성으로 세상에 다시 한 번 나왔다. 이회창 총재는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자 했는데 바로 이것은 조용수의 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잊히고 있지만 잊히지 않는 조용수의 삶을 들여다보며 평화와 화해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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