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친일문제연구, 가람기획, 1995)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의의를 생각한다.”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18년의 노력 끝에 내놓은 ‘친일인명사전’이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에 올려졌다. 언론에서도 역시 주목했지만 현장에 있던 감동을 전하기에는 충분치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서글픈 축복’이었다. 이제야말로 친일 부역자들의 역사적 청산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것이다. 게다가 정부조직 차원에서의 역사 청산에는 한계를 보였던 몇몇 인사들의 친일 행적까지 낱낱이 밝혀낸 것을 보면 정치적 외압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견뎌 낸 이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이 의미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해방 후 친일인사들에 대한 청산이 단행되지 못하고 도리어 매국이 애국으로 위장한 채 국가의 지도층이 되어 그들의 카르텔이 형성 된 것을, 그 슬픔을 이제야 슬프다고 명확히 표현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가벼운 의미가 될 수는 없다. 그 동안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었던 ‘친일애국’의 논리들은 얼마나 국민을 우롱하였던가. “그 시절은 그래도 경제 발전이 있었다.”, “그 시절엔 어쩔 수 없었다.”와 같은 논리는 많이 들어봤는데 그것에 대해 반박하면 “현실감이 없다.”, “왜 다 지나간 일을 꺼내느냐” 하는 억지는 일반정서로 안착된 것 같은 느낌마저 받는다.
이럴 때마다 늘 그때 만약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제대로 작동되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서글프게 과거에 얽매인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우리 선배들 참으로 너무했다. 대의가 존재했고, 민심이 있었는데도 후대에 엄청난 과제를 던져버렸다. 그러나 뜻이 서는 나라를 만들고자 노력한 선배들을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 상대가 너무 막강했던 것을. 이미 치안과 국방을 장악해버린 일제 협력자들을 상대로 벌인 ‘입씨름’이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1949년, 이승만 정권 차원의 끈질긴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중앙청 205호에서 활동을 시작한 반민특위 사무실은 새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찼다.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한 특위요원들은 제일 먼저 일제 강점기 조선비행기공장을 만들어 일제에 협력한 화신재벌의 총수 박흥식을 검거하고, 두 번째로 만주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250여명의 독립군을 붙잡게 하여 17명을 사형 당하게 한 혐의가 있는 이종형을 검거하는 한편 친일파의 거두 최린, 악질 경찰 노덕술을 차례대로 검거하였다. 특위 활동은 체포 305건, 미체포 193건, 자수 61건, 영장취소 30건, 검찰송치 559건등의 활약을 보였지만 그나마 대부분이 집행유예로 풀려나 실제로 처벌받은 민족반역자는 거의 없었다. 이는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다른 나라의 사례와 비교했을 때, 너무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민특위의 의지 이상으로 친일 혐의 혹은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자들의 저항은 거셌다. 백민태라는 자를 매수하여 특위 위원 및 민족세력들을 살해하라는 지령이 실패하자 이들은 더욱 안절부절 못하며 반민특위의 와해를 노리는 일들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욱 문제는 대통령 이승만의 특위활동 불신이었다. 애초 반민특위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 그로서는 특위의 활동이 광범위해지자 불만을 표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행정부를 뒷받침하던 혐의 있는 실세들이 대부분 측근들이었으니 어찌하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특위의 활동이 정상적으로 전개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1949년 난데없이 이승만 정부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급조하여 국회의원 및 특위 위원들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죄명은 남로당 프락치로서 활동하며 국가에 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정말 많이 보던 논리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랬으니 반공이 국시화되는 전쟁 이후는 과연 어땠을까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특위의 활동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힌 이 사건으로 인해 힘을 잃은 특위는 정신적 지주였던 김구 선생마저 암살되자 흐지부지하게 끝맺음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너무 중요했던 ‘친일청산’은 애매모호하게 후대에게 맡겨진다.
특위에 조사를 받은 친일인사들은 우야무야 석방되는 데에 반해 특위에 참여했던 위원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얼마나 열 받는 이야기인가. 국제사회는 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일본에 대해 재판을 열어(극동재판)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7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20명가량을 종신 금고에 처함으로서 죗값을 치르게 했다. 그리고 반역자 청산의 모범적 사례를 제시하는 프랑스는 우리의 상황과 너무 유사하다. 나치에 협력한 기시정권과의 어떠한 타협을 거부하고 전쟁에 승리한 드골 정부는 가혹하다 할 만큼 반역자 청산에 앞장서 몇 만 명을 사형시키고, 수십만 명을 비국민화 시킨다. 또한 특색이 있는 점은 드골의 임시정부는 좌, 우 연합전선으로서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정신을 인정하고, 포용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인 누구나가 드골을 기리는 이유이자 똘레랑스(관용)는 이때부터 꽃 피기 시작했다. 한때 독립운동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드골에 투영해보려는 시도가 어색한 것은 우리의 슬픔이다.
친일문제연구 편집위원들이 출간한 『반민특위』를 보며 올바로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역사가 과거가 아닌 현재도 유랑하고 있음을 느낀다. 반민특위라는 이름을 가진 민간조직이 최근 들어 우후죽순 생기고 있는 것을 보면 친일문제는 단순히 과거형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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