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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처절하게 독서하기> 극비, 조선총독부의 언론탄압

by 이시대 2013. 3. 24.

 

 

 

극비, 조선 총독부의 언론검열과 탄압(정진석,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

“언론탄압이 발생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언론인들이 ‘갑자기’ 살기 어려워 보인다. 기자, 방송인이라면 20대가 바라보기에 최고 인텔리직종임에도 불구하고 주름이 깊어 보인다. 생산의 현장을 떠나 집회의 현장에 나와 있는 언론인에게 모종의 경외감이 생길 정도다. 방송에서 클로징 멘트를 하던 앵커가 갑자기 사라졌다. 이유야 상식적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그리고 인터넷 언론에 대한 지원이 큰 폭으로 축소 편성되었다.

언론 탄압이다. 아니다 언론의 정화다. 하는 결코 대립적이지도 않은 것이 논쟁거리로 등장한다. 한 기자가 언론 노조에서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런데 실상 조사해보니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수배, 체포하는 뉴스가 자주 들리고 있다. 헷갈린다. 어디에 중심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의 언론을 공부해보고자 한다. 어두운 시기에 주옥같은 글을 쓰며 시대를 비췄던 언론인들의 역할을 생각해본다. 일제 치하의 갖은 필화사건, 군부 독재 시기의 탄압을 무릎 쓰고 직필했던 양심적인 기사들을 접하다 보면 절로 감동스러워진다. 때문에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각 언론사에 대한 무차별적 비판에 우선 한발 떨어져 보기로 한다.

『극비, 조선 총독부의 언론검열과 탄압』은 일제 감정기 언론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이뤄졌는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조선 최초로 등장한 신문인 한성순보는 정부기구인 박문국에서 순한문으로 발간되었다. 한성순보는 객관적인 사실보도 보다는 주로 당시 정치상황에 맞춰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눈치를 보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 또한 발생하는 필요사건으로 인해 주변국들의 압력이 거세져 점점 정부 차원에서의 규제법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성순보 이전에는 이미 일인(日人)들이 경영하는 조선신보 등이 발행되어 조선의 언로(言路)확보에 나서고 있었다. 이들 신문은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갈수록 한성순보, 독립신문 등에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친일논조를 펴도록 유도해나갔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1895년부터 발행한 한성신보를 통해 언론 침략을 노골화 했는데 단순히 언론사의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라 명성황후의 시해하기 위한 비밀 본거지로 이용할 정도였다. 초기 일본은 외교적 압박을 통해 언론을 통제할 수 없었는데 이는 언론이 아직 국가의 통제 하에 경영되지 않았고 이들을 규제할 법적근거가 없었다. 그러던 중 외국의 압박과 또한 신문기사의 정부 비판적 기사를 통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던 고종은 ‘신문지조례’를 만들어 언론에 대한 첫 규제를 시도하게 된다.

조선을 강제 병합시킨 일본은 이제 매우 구체적이고 강력한 규제법을 내놓게 되었다. 언론탄압의 실무 사령부로서 고등경찰과와 도서과, 정보과를 배치하여 신문, 영화, 레코드에 대한 모든 언로에 대한 사전, 사후 검열을 하게 된다. 이제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언론인에 대한 구속, 투옥이 잇따라 첫 순직기자가 나오게 된다. 각 신문사마다 전담반을 배치하고 검열에 적발되면 행정처분, 사법처분 등의 보복을 받게 되어 급격히 어용지로 전락하는 경우들이 발생하였다.

제2대 도서과장 다치다 기요다쓰는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된 이후 십 수 년간을 시기별로 나눠 고찰한 바, 감정적 독립 갈망기(1920~1924), 이론투쟁시기(1924~1929), 합법적 논쟁시기(1929년 이후), 친일강요시기(1931년 이후)로 나눠 일제 하 한국 신문들의 논조변화를 살펴보았다. 강제 병합 후 1920년까지는 일제의 무단통치 기간으로서 한국에 신문이란 존재 할 수 없었다. 이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관찰한 것이어서 반대관점에서 해석했을 때 논조의 변화를 살펴보면 항일태세에서 전반적으로 친일태세로 옮겨간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신문사에서 일했던 항일기자들 또는 사회주의 사조를 받은 기자들이 시간이 지나갈수록 탄압으로 투옥되면서 동시에 신문경영이 어려워지자 발생한 자연스런 상황이었다.

 

 

 

1920년 조선,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1940년 양 일간지가 동시에 폐간될 때까지 한국의 언로는 참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발현되었던 기자들의 항일의지는 곧바로 필화사건이 되었고 이는 민족의식을 크게 고취하는 방향으로도 나타났다. 우리에게 익숙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도 당시에 일어난 일이다. 물론 동아일보는 정간되었다. 탄압의 계기를 마련한 총독부는 조선, 동아, 중앙을 지목하고 활자크기까지 간여하는 등 사정은 크게 후퇴하였고 끝내 천황의 사진을 싣기 이르렀다고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는 평가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해방이 되고 언론의 자유를 다시 되찾는 듯 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사(言論史)가 박복한 지 군부독재로 흘러서는 언론 자유가 크게 후퇴하였다. 검열 및 보도지침이 하달되고 언론인에 대한 감금, 폭행이 일상화 되었다. 각 신문사의 해직기자들은 언론자유를 외쳤으나 극소수만이 다시 언론의 현장으로 돌아갔던 과거는 지금에 와서 ‘언론 자유’를 위한 올바른 싸움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전해준다. 언론에 대한 탄압과 핍박은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알려주는 바로미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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