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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의 view

정파갈등의 역사성

by 이시대 2014. 10. 11.

 

 

 

‪#‎1919년‬ 9월 한성정부, 블라디보스톡의 임시정부와의 통합으로 주요 각 정파가 총 망라되었던 상해임시정부는 채 2년을 가지 못하고 분열되고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결의와 탄핵이 추진되면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협성회와 반대하는 군사통일촉성회가 개최되었는가 하면 모스크바에서 임시정부로 보내던 정치자금이 배달사고가 나면서 내적으로 갈등이 심해지는 상황이 생겼다. 비슷한 시점에 간도에서는 훈춘사건, 자유시참변이 발생하면서 상해에 위치한 임시정부의 기능이 한계가 드러나 정부의 간도 이전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국민대표자대회'는 이런 내외적 갈등을 수습하고, 통합정부로서의 위상을 재구축하기 위해 1923년 1월 3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각계대표 124명이 모여 성립되었다. 최대의 독립운동가가 모인 이 대회는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의 전망을 놓고 창조파와 개조파의 임장차이가 확연, 결렬되고 말았으며 김구로 대표되는 고수파가 외롭게 지키던 임시정부는 1941년 김원봉이 합류하고 나서야 그 앞에 다시 '통합'이란 단어가 붙여졌다.

‪#‎사이토마코토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1920년대의 통치기를 이른바 '문화통치'라 부른다. 이 문화통치는 정치전략으로는 대단히 유효해서 민족운동의 흐름을 '타협적'이라는 용어와 '비타협적'이라는 용어로 갈라놓았다. 1924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이란 글을 게재한 것을 시작으로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그룹은 일제의 통치에 '타협'적인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5년 11월, 26년 6월 김재봉과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는 1차, 2차 조선공산당이 검거선풍을 일으키며 붕괴됨으로서, '독립우선'을 목표로 하는 정파들이 현실적 타격을 입게되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 간에는 연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마침 26년 일본에서 귀국한 안광천을 중심으로 한 일월회 그룹이 '정우회 선언'을 통해 민족주의자들과의 적극 제휴를 천명하면서,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배제한 모든 정파가 1927년 '신간회'라는 이름으로 결집되었다.

신간회는 창립 10개월 만에 지회 수를 100여개로 확대하고 광주학생사건을 '민중대회'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등 합법적 범위 하의 최대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하지만, 민중대회사건으로 지도부가 대거 검거당하고, 이후 신간회의 주도권 문제를 두고 좌우 내부 갈등이 이어지자 31년 5월 15일 해소를 결의하고 만다. 그리고 국내 독립운동의 좌우협동은 45년에나 가서야 이뤄진다.




"모든 정치세력은 분열한다"


아주 드라이한 문장이지만 나는 그게 진실에 가깝다고 본다. 다만 분열에 대처하는 자세에 따라 이후 상황이 급격히 다른 것이라 주장할 뿐이다. 심지어는 예시한대로 주권을 회복하느냐의 문제를 놓고도 정파의 입장은 온도차이가 매우컸다. 정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정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다만 보수기득권 구조를 견고히 지키는 새누리당은 정파간 분열이 잠잠한 반면, 이를 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야당은 정파 간 분열이 계속해서 노출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민심은 분열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는다는 것 역시 정치역사가 남겨준 소중한 교훈이라 생각해보면, 야당을 개혁하고자 하는 중요한 전략 중의 하나로 '정파갈등해소' 가 왜 중요한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그러지 않으면 한번에 싹 다 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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