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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의 view

김규식과 조선민족혁명당

by 이시대 2015. 4. 16.

 

 

-김규식과 조선민족혁명당-

이름: 김규식
생년월일: 1881년 1월 29일
직업: 교육가, 고등교육 수료
구사 외국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소속단체: 고려당 후보(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후보당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영문학을 전공한 김규식 박사(이하 김규식, 모든 인물 존칭 생략)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 차 모스크바에 머무르며 위와같은 프로필을 작성해 제출했다. 이 길은 결코 간단히 온 길이 아니었다. 기록이 뒷바침 되는 것은 아니지만, 1919년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논의할 것으로 예정된 파리강회의에 대표단으로 파견될만큼 유창한 영어실력의 소유자이자 미국통이었던 그가 향후 냉전의 한축을 이룰 소련에, 그것도 소련에 거주하는 한인들로 구성된 고려공산당의 후보당원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이 무척 인상 깊다.

김규식은 조선대표단장으로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운동의 중심지' 로서의 모스크바를 칭찬하고, 이 불씨를 얻고자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사실 이후의 행보를 보건데, 그가 공산당원으로서의 깊은 자각으로 인한 행보라기 보단 '민족자결주의'같은 국제조류가 조선의 상황과는 맞지 않자 또 다른 축이 될 소련에 외교적 행보를 한 것이라 추측된다. 망국 속에서 이용할 가치가 있다면 뭔들 못하리.

그 당시 김규식을 비롯한 그의 동지들은 굉장히 난처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임시정부가 상해정부로 1919년에 통합되고 명실상부 이 그룹이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기관이 되어야 했으나 몇년 지나지 않아 운동의 방략과 참여자의 위상 문제로 인한 창조-개조 논쟁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외부요인을 통한 출로를 모색해볼만 할 즈음, 모스크바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 신한청년당으로 한배를 탔던 여운형이 중국 혁명물결의 과정 속에서 반제국주의를 중심에 둔 단결노선을(국공합작) 훗날 국내에 이식하려 했듯이, 김규식 역시 극동의 상황을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난 김규식과 여운형이 46년의 좌우합작 노선에 서게 된 것이 바로 위와 같은 순도 높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본다.

하지만 극동민족대회라고 해서 엄청난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대회의 구체적인 열매는 볼셰비키가 먹는 것이지 김규식과 같은 외교형 정치인이 성과로 만들기에는 그들이 그렇게 호락한 집단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김규식은 해방 이전까지 내내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이런 노선을 유지했다. 참여했던 민족유일당 운동이 국내 신간회 해소의 여파로 침체기를 맞았다면, 31년 들어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이런 대외정세를 활용하고자 다시 통합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한국독립당, 조선의열단, 조선혁명당 등 좌우익 세력을 망라한 협의 기구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산파가 되고, 이 협의기구가 다시 단일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동맹을 통한 경험이 없었다면, 훗날 중경에서 국내로 입국하는 중경임시정부가 매우 왜소하고 쪼그라들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결코 김구 중심의 역사로만 써내려갈 수 없다.

분열보다는 통합의 길을 선택한 행보가 영향을 미쳤는지 45년 임시정부 부주석의 위상으로 입국한 이후에도 김규식은 결코 이승만과 같은 길에 설 수는 없었다. 이미 중국에서 손문의 길을 학습했던 김규식이 '권력욕을 내세우고, 그저 명함파기 좋아했던' 이승만과는 그 경험의 순도가 너무나도 크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소 군정이 대립된 국내의 정치환경은 결국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중도 우파'의 대표로 참석한 좌우합작마저(중도좌파의 경우 여운형) 여의치 않고, UN감시 하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결국 최후로 김일성, 김두봉과의 4요인 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을 통해 국면을 전환시키려한 시도는 그의 삶과 매우 유사한 경로를 그리고 있다. 이것은 그저 완고했던 김구와는 또 다른 수준의 자기헌신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50년 6.25.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하나의 특수작전을 전개한다.

이른바 모시기 공작.

인민군은 임시정부의 요인을 중심으로 북한 정권의 정통성 강화에 도움이 될만한 정치가들을 대거 납북한다. 그 안에 노구였던 김규식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된 납북여정 속에서 그해 12월 10일 북한 만포 근처의 한 병원에서 그만 눈을 감게 된다.

북한 정권의 요인들 홍명희, 김원봉, 홍증식, 정노식, 최창익 역시 이 거대한 애국자의 시신 앞에서 눈물지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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