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처절하게 독서하기>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by 이시대 2013. 3. 25.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최병권, 이정옥 엮음, 휴머니스트, 2003)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 인가.”

사람은 언제나 자기 존재에 대한 근거를 찾기 원한다. 또한 누구나 어떠한 사소한 행동에 있어서도 그것에 대한 명분, 행동의 정당성을 갖추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근거가 질적 수준이 보장될 때 안심하고는 한다. 하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총체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복잡할까? 게다가 이것은 혼자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필자가 책을 읽는 이유 역시 여기서 기인한다. 끊임없이 존재 이유에 대해 되묻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의 질문과 답은 사람이 활동하는 모든 분야에 있어서 녹아들어있다. 때로는 철학의 영역에서 찾기도 하며, 과학, 예술, 역사에서 고루 찾고자 시도한다. 그것의 총체적 합을 ‘교양’이라 표현하는 게 어떨까 한다. 교양을 단순히 시간이 날 때,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옆에 두고 지침서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를 풍성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교양을 익히자는 말이 한국적 풍토에서는 여유 있는 자들의 놀이라 폄하할지도 모르겠다. 물질적 풍요를 앞세우는 것이 미덕이라는 가치가 만연한 요즘이지만 그러나 이럴 때가 역설적으로 교양이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때다. 물질에 대한 추구는 존재의 아주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최병권, 이정옥씨가 엮은『세계의 교양을 읽는다.』는 프랑스의 독특한 입시제도인 바칼로레아의 시험 문제를 통해서 존재를 묻는 질문들을 차례로 던진다. 물론 가장 영리한 답들이 나와 있지만 책을 보면서 독자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이 책이 가치가 있다.

 



구체적인 질문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프랑스 사회를 살펴봐야겠다. 프랑스는 또 하나의 국경일로서 ‘생각하는 날’인 바칼로레아 시험이 있는 날은 온통 교양의 바다를 이룬다. 교육정도와는 관계없이 “볼테르가 말하길”, “위고가 말하길”, “공산당 선언에 의하면”등으로 인용을 좋아하는 프랑스 사회는 그만큼 지성적인 분위기에서 다른 사회와 차이가 난다. 그런 프랑스 사회를 대변하는 예로서 ‘타인의 향기’ 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좌파인텔리고,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주인공은 돈은 많지만 지성이 없다. 이럴 때 남자는 말 못할 열등감으로 괴로워한다. 물론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현상이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닐 수도 있겠다. 지성과 교양이 일반화되어 있는 프랑스 사회, 한번 배워 볼 만 하지 않은가. 다시 돌아와 바칼로레아의 질문 중 핵심질문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본다.

첫 번째,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 몰라야 하고, 우리를 만족시키는 방법이 은밀해서 눈치 채지 못해야 한다. 뭐가 불행이고 행복인지 모르는 것이 행복하다는 얘기다. 나는 전혀 행복하지 못한데 타인을 나를 가리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을까? 행복이란 즉 나의 마음가짐에 달려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나의 마음가짐을 행복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로서 행복이란 우리가 의식할 때 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한국 사회에서 나는 왜 불행한가를 살펴본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해보고, 사회에 대한 비판도 해본다. 그러나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복을 의식적으로 기획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그렇게 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할지 ‘의식적’으로 자아를 기획함으로서 행복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여, 이제부터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두 번째, 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관용이란 타자가 존재할 때만 있을 수 있는 개념이다. 한국에서도 똘레랑스라고 해서 홍세화씨가 대중화시킨 언어가 있는데 바로 관용을 뜻한다. 상대방에 대한 관용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관용이 부족한 사회는 어딘가 부족해보이고 팍팍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상대를 존중만 할 수 있을까? 인간은 본디 낯선 것을 불신하는 쪽으로 의식이 설정되어 있다고 한다. 즉 관용이란 본능적으로 자발성을 띄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관용이란 인간의 전반적 비하를 가져오는 경우에는 성립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대화와 타협, 관용이 부족한 사회라고 하지만 이를 지나치게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인간의 전반적 비하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비관용은 관용과 함께 쓰일 수 없다.

세 번째, 철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이것은 질문 자체가 올바르지 못하다. 역사상 철학을 기반으로 세상을 바꾸려한 시도, 혹은 바꿔 낸 실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칼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했을 따름이다. 이제 철학은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명언을 했다. 자신의 철학에 대한 자부심인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고대에서도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철학적 사유가 국가 통치 체제의 밑거름이 되었고,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도 루소의 ‘사회 계약론’은 효력을 발휘했다. 철학이 세계를 바꾸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역사적 유산을 무시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철학은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국사회는 어떠한 철학이 필요할까? 엄청나게 어렵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네 번째, 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여기 하나의 단순한 도로포장용 콜라타르가 있다. 하지만 예술가는 이 콜타르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또한 예술가에 의해 포장된 도로는 예전의 그 도로가 아닐 수도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기존과 다른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의 작품에서 기존에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이 경험하게 된다. 지금 당장 광화문 광장의 故 백남준의 ‘프랙탈거북선’을 찾아가 감상해보자. 거북선을 인식하는 기존 체계가 흔들릴 것이다. 클레의 표현은 예술과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예술은 보이게 하는 것이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다.”

하나 더, 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동도 이성적인 행동일 수 있는가.
“악법도 법이다.” 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문구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했다는 이 말은 그러나 지독한 오독(誤讀)을 거쳐 한국에서는 군부정권을 합리화 아니면 독재정권을 합리화하는데 쓰여 졌다. 법에는 도덕법과 일반적인 의미의 사법적인 법이 있는데 도덕법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들이다. 예컨대 살인을 하지 말라와 같은 것은 도덕적으로 타당한 가치로서 법이 강제하지 못한다. 국가나 어떤 집단이 한 개인에게 살인을 명령하는 것은 법적으로 합리화 될 수 없는 것이지만 인간은 군대와 같은 특수한 조건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도덕법을 근거로 집총을 거부한 ‘병역기피자’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자, 이렇게 국가가 기본적인 도덕률에 위배되는 법을 제정할 때는 법 자체가 이성치 못함으로 그것에 저항하는 행위는 이성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칼로레아 시험에서의 최고 점수였다. 법이 강제하려고 하는 영역이 보편타당하지 못한 경우는 한국에서 어떤 게 있을까?

그 밖에도 우리는 존재의 기본이 되는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 내려 볼 수 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함으로서 삶의 잣대와 기준을 풍부하게 할 때, 또한 그러한 질문들을 기획할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