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야부키 스스무, 역사넷, 2006)
“순망치한(脣亡齒寒),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1949년 10월 1일 오전, 도무지 그는 잠이 오질 않았다. 물론 평소에도 계속되는 전투와 정치적 긴장 속에서 잠을 설피 자는 습관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긴장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도 불안했는지 경비실을 통해 그의 안부를 계속 묻고 있었다. 남아있는 문서작성을 마무리 하고 10분 정도 산보를 하고 오니 잠이 몰려드는 것 같았다. 새벽 여섯시 30분이었다.
오후 한시, 보좌진이 그를 깨웠다. 노곤함이 없지 않았지만 평소처럼 눈을 뜨자마자 가볍게 차를 한잔 마시고, 어제 못다 읽은 책을 펼쳐보기 시작했다. 언제나 책은 그의 옆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책에 집중이 잘 안되는 날이었다. “오후 두시까지는 근정전으로 가야한다.” 주더,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런비스, 장란, 리지선, 쑹칭링, 가오강 등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두시 오십분이 되자 오묘한 긴장감이 그를 감쌌다. 일행은 텐안먼 성루 뒤까지 다다라 한발자국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성루 위에 다다르자 그들을 맞이해 준 것은 수십만의 환영인파였다.
그가 단상에 높게 서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 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라고 선언하자 수십만의 인파들은 우레와 같은 환성을 질렀다. 곧이어 예포 54문이 발사되자 환영 의식은 절정을 달했고,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마오쩌둥 만세”
주석단에 서있는 건국위원들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기쁨과 환희를 가장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은 단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였다. 그들은 지나온 일들을 회상하였다. 그들이 어린 시절 중국의 실상은 참담한 것이었다. 지역 군벌과 중앙 정부의 수탈은 당장 자신들의 집에까지 피해를 끼쳤다. 더군다나 1894년부터 전개된 청일전쟁의 화마가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불안해하던 시기였다. 피압박 민족의 대게가 그렇듯 청조 말기 사회의 청년들은 내적으론 변혁을 꿈꾸고 외적으론 일제타도를 꿈꾸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부농의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신해혁명의 성공을 위해 혁명군에 입대하지만 저우언라이는 다소 모범생적 기질이 있었는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조국의 불안정한 정세는 국내외의 청년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혁명의 불씨를 구체화 시킨 청년들은 1921년 중국공산당을 창립하여, 구체적인 혁명노선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이는 신해혁명이 미완으로 끝나자 더욱 의식화되고 전투화한 이들이 1917년 러시아의 계급혁명을 국내에 구체화하기 위한 시도였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이때까지 안면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산당의 노선에 동조하는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보기에 현재의 공산당 지도부는 러시아 혁명을 기계적으로 수입하여 현실과 맞지 않는 노선을 수립하고 있다고 보았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현실에 맞게 도시노동자 계급이 아닌 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고, 이 노선을 끝까지 관철한 마오쩌둥은 결국 중국 혁명의 가장 앞자리에 올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 역시 마오쩌둥과 같은 호방함은 없었지만 상해에서 무장봉기를 지휘하고, 남창봉기 역시 지도하는 등 역량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에게 어려움은 도처에 있었다. 1937년 7월 루거우차오사건(노구교사건)으로 본격적으로 중국 대륙을 침략한 일본에 맞서 대일항일전선으로 그나마 제휴를 유지하던 공산당과 국민당은 그 이전부터 번번이 충돌하였고, 크고 작은 사건들로 합작은 파기되곤 하였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중국을 개조하려던 공산당과 국민당의 근본 철학 차이가 있겠지만 공산당이 보기에 국민당은 또 하나의 수탈 정당이자 부패 정당이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농민은 국민당-공산당 내전(국공내전)이 발발하자 공산당 편을 들곤 하였다.
일본의 본격적인 대륙침략 이전, 국민당 장제스는 1933년 공산당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껴 50만의 대군을 지휘하여 공산당을 축출하려고 하였으나 중국 인민들 속에서 신화로 기억되는 ‘장정’을 통해 공산당은 도리어 전세를 역전시키고, 마오쩌둥은 확고히 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한다. 훗날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항일전쟁과 관련하여 혹은 국공합작과 관련하여 수차례 회담을 하지만 상호 불신을 극복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극복해나가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의 최고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중일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 1945년, 국민당과 공산당 역시 정전을 선언하지만 적대적 동거가 오래갈 수는 없는 법, 다시 국공내전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공산당의 승리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1949년 1월 공산당 군대가 평북에 입성하자 이제 전 중국은 공산당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 안에서 희생된 동지들을 생각하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그리고 건국위원들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켠이 아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중국은 두 가지 혁명의 달성 즉, 반봉건과 반외세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들은 슬픔과 동시에 승리의 오묘한 쾌감을 느꼈다.

야부키 스스무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건국의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 2인의 삶을 조명한 책이다. 세계 혁명사를 살펴보다보면 혁명 지도자의 역할이 무척 중요함을 알 수 있는데 아마 그 중에서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경쟁자로, 대부분은 동반자로서 중국의 역사를 전개시킨 이들의 역할은 눈부신 것 이었다. 하지만 이후 마오쩌둥은 ‘극좌 모험주의’라고 평가받는 ‘문화대혁명’을 통해 독재적 권력자의 말로를 나타냈고 저우언라이는 그의 밑에서 지시를 묵묵히 수행하면서 오점도 남겼지만 중국 인민들은 아직도 그들을 추억하고 있다. 중국의 발전이 급격한 오늘날, 중국의 역사 속 지도자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는 시도는 한국인들의 굉장히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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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붉은 별』(에드가 스노우, 두레,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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