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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의 view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님 편히 가시길

by 이시대 2013. 3. 30.

 한국 현대 의문사 사건 중 1호로 분류되는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유족들이 공개했을 때, 왜 유족들이 의문사가 아닌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알게되었다. 동시에 그로 대표되는 수많은 독립지사와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선 정치인들의 삶을 유추했을 때, 가슴이 뭉클거렸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바로 직전 해방정국의 혼란과 전쟁의 포화 속에서 죽어간 양심가들과 8~90년대 겪었던 선배들의 고초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이 선을 가장 오랫동안 유지했던 것이 장준하 선생의 삶 아니었나 싶다. 

 41년 일본에 유학간 다른 많은이들처럼, 성전에 참여하라는 이광수, 김활란 등의 호소 속에서 학병에 강제징집 당한 것은 식민지 청년의 불행함이었다. 그럼에도 장준하 선생이 지도자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은 철통같은 삼엄함 속에서도 학병을 탈출해 광활한 중국대륙을 걸어서 임시정부 중경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서 가능한 것이었다. 50명의 대원과 도착한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의 청년지대로서의 역할을 통해 왜소한 임시정부의 군사력을 높이는 한편, 임시정부의 핵심전략이었던 국내침투 공작을 앞장서 실행한 것은 선생의 기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긴 칼이 차고 싶어 일본육사에 진출한 사람과는 분명 다른 결일 수 밖에 없다. 이후에도 사상계를 통해 4.19 혁명의 의미를 확대하고, 언론탄압과 재야정치인 탄압의 시련 속에서도, 옥중에서 출마해 당선된 것은 당시 민심의 방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1975년 8월, 의문의 전화와 범인으로 지목되는 사람과의 산행 그리고 죽음. 사건 현장에 가장 먼저 방문한 육군방첩대와 방첩대장의 박정희 대통령 단독 면담. 지금도 관련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정보기관의 침묵 속에서 공개된 장준하 선생의 유골. 그리고 사실상의 타살로 결론.  극복하기에 걸린 시간은 38년이 지났다.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님 편히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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