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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함께하는 독서강독회-지배자의 국가 민중의나라2

by 이시대 2013. 8. 20.

<근현대사 에센스2>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정년퇴임)의 책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돌베개출판사, 2010)' 를 기본으로 독서강독회 핵심내용 정리! 다음주부터는 서울 성북구에서 벗어나 대학로, 서대문, 여의도 인근에서 진행할 예정이니 거리상 참석이 어려우셨던 분들은 과감히 함께해요~! 


챕터2. 독립운동과 새나라 구상


1. 독립운동을 타국영토에서 전개한다는 것은 특수한 경우에 속함. 타국 한 지역에서만 집중한 것도 아니고 국가와 사회체제가 달리하는데도 폭 넓게 전개됨. 다만 아쉬운 것은 여러곳으로 분산되어 전개된 독립운동은 상호 연락을 취하기도 했지만 독자적으로 전개한 경우가 훨씬 많음. 만주, 러시아, 미국 등에서 분산 전개된 운동은 성과 못지 않게 해방 후 정치세력 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해악도 발생했음. 

2. 독립운동은 속해있는 지역의 정세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음. 예컨데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설치될 수 있었던 이유가 각종 핵심정보가 몰려있던 국제도시인 점과 더불어 프랑스 조계가 설치되어 안전이 보장되었다는 긍정의 환경이 있었지만 반대로,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과 중국 봉천성 경무처장이 만주한인단체 해산, 항일단체 인사들의 체포를 골자로한 '미쓰야협정'을 체결하자 당장 그 지역에서 싸웠던 독립군활동은 어려워질 수 밖에 없었던 점 등 지역의 정세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곤 했음.

3. 1910년대의 독립운동을 보면 1907년 이래로 국내 의병들을 일제가 대토벌함에 따라 국내 의병세력은 만주의 독립운동과 연계를 모색함, 국내에 연결망이 있던 대한광복회는 1917년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여 만주로 보내는 등 국내 조건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의병력을 만주로 집중하기 시작함, 동시에 국내 엘리트 정치세력 역시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을 목표로 두고 만주, 중러 국경지역, 미국 등으로 옮겨감,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이회영)와 하와이의 국민군단(박용만)이 대표적.

4. 1910년도에는 독립운동, 독립군운동을 하더라도, 여전히 복벽주의(군주제 지향)가 있었지만 중반 이후 복벽주의는 눈에 띄게 줄고, 근대 공화국 건설에 대한 이해와 요구가 대세를 이룸.

5. 1919년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따른 전환기라는 흐름 속에서 발생한 저항으로서 무단통치를 끝낸 것 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수준의 민권의식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자유와 평등의 요구가 집약되었음,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것처럼 3.1운동도 정치요구에서 경제요구로 전환해나가는 특징도 보여줌.

6. 3.1운동에서 보여준 규모와 폭발력은 집단 및 개인에게 각성의 효과를 줌, 이미 중국으로 망명해 신해혁명에 참가한 인사들과 연결망을 가졌던 신규식, 조소앙 등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해, 상해임시정부의 토대를 만들었는데, 1919년애는 임시의정원을 두고 국무총리제를 채택해 초대 총리로 이승만을 선출하고, 얼마뒤에는 안창호가 결합하면서 노령대한민국의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성정부를 통합해 통합정부를 세움. 정부가 세워진 후 서간도, 북간도의 군사력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등 정-군 라인을 형성하고, 국내로의 정보연결망인 연통제와 교통국을 세움.

7. 상해임시정부는 1921년이 들어서자 이승만의 위임통치문제, 러시아로부터 오는 정치자금 배달사고 등으로 인해 내분이 심화되어 이를 타개하고자 1923년 독립운동시기 최대의 협의체인 '국민대표대회'를 개최하는데 성공하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고수파, 개조파, 창조파의 입장이 갈려 창조파는 완전이탈, 개조파는 의욕상실로 인해 통합 임시정부로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되어버림.

8. 국민대표대회가 기능을 못하고 해산되자 안창호를 중심으로 '민족유일당' 운동이 전개됨, 정부의 형태보다 당적형태의 단일당을 조직하려는 시도는 국내에도 전파되어, 좌우협동기구인 신간회가 창립되는데 기여함, 신간회는 일제의 문화통치가 계속되어 타협주의자, 개량주의자가 속출하자 이들을 제외한 모든 반일운동을 집중하기 위해 생겨남, 초기 신간회 수립을 둘러싸고 내부 논쟁이 있었던 사회주의자 그룹도 '정우회 선언'을 통해 협동전선의 명분을 제시함.

9. 신간회의 '허헌' 집행부가 들어선 이후 전라도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 대규모항쟁으로 발전한 '광주학생운동'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하는 등의 활동도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1928년 12월 코민테른 정치서기국이 채택한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의 결별과 노동자 농민 중심성을 확보), 이른바 12월 테제를 받아들임에 따라 신간회 조직을 집단탈퇴해 국내의 협동전선이 붕괴됨.

10. 조선공산당은 1926년 국내에 조직되는데, 이는 1924년 결성된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라는 전국단체를 대중적인 기반으로 하고, 그 바탕에서 정예분자를 비밀리에 영입하는 방법을 통해 등장함, 일제의 완전한 타도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실현을 강조함.

11. 1920년 무력항쟁으로는 여전히 만주일대에 주목해야 하는데, 북간도에서 치뤄진 삼둔자 전투에서 '대한군북로독군부'의 소대가 일본군을 격파했는데, 이를 보복하고자 일본군 19사단은 추격대대를 편성하였으나 봉오동에서 홍범도 부대에 대패함. 이를 '독립전쟁의 개전'으로 일컫기도 함. 이것을 계기로 일제는 독립군 부대를 완전 소탕하기 위해 중국의 마적단을 회유하여 '훈춘사건'을 일으켜 군사력을 집중해 '독립군 토벌계획'을 수립하나 청산리일대에서 김좌진과 홍범도의 연합군대에게 대패함.

12.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은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됨,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중일전쟁, 미일전쟁이 실현되면 독립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함, 이러한 인식 아래 활동의 폭과 수위를 넓히기 시작함, 김구가 배후가 된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은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상해사변'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한국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커다란 감명을 주었고, 운동단체들의 통합을 견인할 수 있었음, 비록 통합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으나 35년에는 통합신당인 '민족혁명당'이 출범한 바 있음.

13.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은 독립운동계에 더욱 큰 희망을 불어넣었음, 국민당 주석 장개석은 갈등사이의 좌-우 수장인 김원봉과 김구를 설득하여,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글'을 배포, 합작을 호소하게 함. 이에 따라 양자의 군사력도 통합되는 분위기였으나 김원봉의 무장력 상당수가 중국공산당의 거점인 화북지대로 옮겨가 '조선의용군'을 설립함으로서 군사통합은 부분통합으로 이뤄졌음.

14. 31년 만주침략은 만주일대의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 이전과 같은 큰 부대 운용이 어려워져 야산대(빨치산)중심으로 전투가 전개됨, 양세봉을 주축으로한 '조선혁명군'이 가장 위세가 있었으나 동북지방에서는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이 지도자로 활동했음, 김일성은 국경을 넘어 20키로까지 들어가 경찰서 등을 습격한 이른바 '보천보 전투'를 통해 크게 위세를 높임.

15. 30년대 국내 환경은 크게 위축되어 있었음, 좌우 협동전선이 무너지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소수로 남고, 사회주의자들은 12월 테제의 영향으로 더욱 경색된 자세를 취하게 됨. 이재유 등은 조선공산당이 완전히 무너진 30년대 들어 이를 재건하기 위해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하지만, 500명이나 연루된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그룹 사건'으로 토대가 붕괴됨, 이후 지도급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감옥에서 보내고 40년대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음.

16. 40년대 들어 전개된 미-일 개전을 통해 이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이 눈앞에 있음을 전망하면서, 중국에서는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화북일대로 넘어간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의용군'을 조직, 태항산에서 일본군의 소탕전에 대응하는 '반소탕전'을 전개하는 등 보다 적극성을 띄게 됨.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1940년 '마에다 중대'가 김일성 부대에 의해 섬멸되기도 했지만, 일본의 대규모 정규 군사력이 집중된 곳이라 소련-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음. 국내에서는 여운형이 미-일 개전의 결과를 전망하면서 독립동맹을 조직하고, 이는 해방 후 국내의 대규모 정치단체 '건국준비위원회'로 수렴되었음. 건국준비위원회는 해외의 독립군 혹은 무장대와 달리 국내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가장 빨리 해방정국에 대응할 수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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