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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의 view

김형욱과 정윤회

by 이시대 2014. 12. 30.
지금은 때가 아니고 박 정권이 넘어가려 할 때쯤 모든 것을 밝히겠소. 내가 한 방만 때리면 박 정권은 그대로 무너집니다"

1973년 대만대학 박사 학위를 받으러 출국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배신감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회심의 눈빛을 번뜩였다. 박정희의 밑에서 온갖 부정한 방법까지 동원해 통치를 뒷받침했던 그에게는 곧 자신의 입이 박정희에게는 날 선 칼날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며칠 후 난데없이 미국에 나타났다. 어차피 국내에 들어가도 2인자를 용납하지 않은 박정권 밑에서 고생해봤자 군부실세에서 순식간에 쫒겨난 윤필용이나, 자신의 비자금을 관리했던 김성곤처럼 카이젤 수염을 쥐어 뜯기며 구타당할 처지를 피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단 그에게 둘려쌓인 혐의였던 '정일권 추대' 건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권위주의적인 권력에 대한 도전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시기였다.
 

 



중앙정보부장을 7년 간이나 했던 김형욱은 누구보다도 사정라인의 정보망과 조직망을 꿰뚫고 있을 터, 해외로 나갔다한들 이후락의 눈길이 자신을 좆고 있음을 모를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탕한 생활을 즐겼으며 오히려 박정권에 대한 자신의 정보를 바탕으로 중앙정보부와의 흥정을 시도하며, 천문학적인 생활비를 얻어낼만큼 '실력행사'를 하고 다녔다. 박정권으로서는 그가 잠자코 입만 다문다면 적절히 관리할 방침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박정권의 그런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김형욱은 넘지 말아야될 선을 넘고야 말았다. 박정권과의 협상 지렛대를 높여 '몸값'을 올리기 위한 투자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77년 6월 22일 미 하원 프레이져위원회 청문회 증언대에 서서 '박동선 게이트', '김대중 납치사건' '부정부패' '인권탄압' 등을 열거하며, 박 정권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물론 그가 가진 정보를 모두 공개했으리란 것은 지나친 상상일 것이고, 프레이져위원회가 그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믿으리란 것도 지나친 상상이다. 위원회는 이미 김형욱의 비밀구좌를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다.

김형욱이 실종된 것은 79년 10월이었다. 파리로 이동한 그는 한마디로 '증발'해버렸다. 당시 김형욱은 '회고록' 출판 문제로 박 정권과 막판 거래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김형욱이 끝까지 지렛대로 삼으려 했던 것은 박정희의 사생활이었던 것이다. 박 정권은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으면 500만 달러 수수를 약속받았고, 돈을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 것이다.

김형욱의 죽음은 그동안 '국내 압송 후 처형', '파리 현지 처형' 등으로 나뉘었고, 방법 역시 '폐차장 압축' '양계장 분쇄' '권총 사살' 등으로 추측되었으나 국정원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역시 그 진상을 밝혀내지 못했다. 당시 김형욱의 죽음에 직접 개입한 중정부장 김재규-프랑스 조직원 이상열이(김재규 10.26건으로 사형) 끝내 입을 굳게 다물었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권력은 그토록 잔인했다.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던 박정희 자체에게서 그 근본을 따져야겠지만, 주변의 간신들 역시 김형욱의 재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김종필, 이후락 등은 전 중정부장 김형욱의 존재가 못내 입안의 가시같았을 것이다.

이른바 '정윤회 파동'을 보면서 '차가운 권력의 극대화'를 보는 것 같다. 비록 김형욱 건의 경우와는 비교, 대입하기 어렵게 단순한 인사개입 사안이라 판단되지만, 최모 경위의 자살을 보며, 자살까지 이르게 한 실체가 가진 성격이 어느정도 유추가 된다는 뜻이다.

권력을 음지에서 다루는게 익숙한 그룹이 국정을 농단하는 모습으로 인해 결국 개헌론은 계속해서 탄력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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