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ical view

<다시 보는 8.15인물열전-존 하지와 이승만>

by 이시대 2019. 1. 29.

<다시 보는 8.15인물열전-존 하지와 이승만>

김동환의 view 2014/08/18 19:46 이시대






<한번 더 보는 8.15 인물열전 1-존 하지와 이승만>

북위 38도 이남에 대한 점령, 점령부대에 대한 반란금지, 영어를 공식언어로 한다는 더글러스 맥아더 명의의 팸플릿이 45년 9월 서울에 이리저리 흩어져있었다. 그 위압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한국사람들은 연합국의 승리가 한반도의 해방을 가져왔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아직 갈등국면이 표면화되기 전까지는 소련 역시 우국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한국사람들은 비록 연합국의 내정 개입을 예상하면서도, 자력을 기르기 위한 시도 혹은 연합국 진주 이후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자체의 정무행정기관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을 미군 진주 이전에 수립하는 등 나름의 대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군정 사령관에 취임한 존 하지는 '정당은 오라' 정책은 표방하면서도 행정기관인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불인정하고(훗날 입국한 임시정부 역시 마찬가지), 당과 사회단체는 의견 수렴의 절차로서 국한시켜 여론을 통제하고 일제식민지배의 정책을 온존시켜 이후의 정국 갈등을 야기시킨만큼, 하지 사령관이 해방정국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럼 대체 하지는 누구인가. 여지껏 어떤 자료도 하지 개인이 한국에 부임해오기 전 한국에 대해 어떤 애정을 보였는지도 안나타나있고, 그의 전선 역시 한반도가 아니었다. 1893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그는 입대 후 보병장교로 프랑스, 과달카날, 마리아나 전선에서 싸우다 그의 24군단과 함께 대일전을 위해 '짧은' 기간 오키나와에 머물러 있었다. 소련의 대일본 참전 이후 남하하는 소련군의 정치적 확장에 대비하기 위해 지리적으로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그 역시 중국의 반대로 한국에 오지 못하게 된 10군 사령관 스틸웰을 대치했을 뿐, 한국의 입장에서는 아마추어가 통치를 하러오게 된 것이다.

하지가 초기부터 한국에서 닥친 시련은 가벼운 게 아니었다. 해방 이후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은 국내에 이미 조성된 정치조직을 뛰어넘어 일반인에게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어서 점령군의 행정을 어렵게 만드는 것과 더불어, 대중공간에서조차 미군정을 순수히 받아들이는 한국민주당 등의 우익집단보다 인민공화국을 구성하는 그룹인 조선공산당, 건국동맹 세력, 전평, 전농이 세력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 우익 주도의 정국을 형성하고자 했던 미군정의 목표와 현실은 크게 엇나가 있었다는 점이 미군정을 괴롭혔다.

그런 점 때문에 미군정은 미국에 있던 이승만의 전략적 가치에 눈을 두게 되었다. 해방 이후 미 국무부의 입국 불허 조치로 국내 정치에 별반 영향력이 없던 이승만을 데려온 것은 맥아더의 사령부에 의한 것으로서, 하지는 이 노회한 정치가가 아주 강한 권력 욕망과 미국에서도 반소 활동을 통해 국무부를 괴롭히고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한국에 갖다만 놔도 인공에 대항하는 구심점이 되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에 대한 하지의 무수한 찬사는 절박한 것이었다. 물론 국무부에 로비스트까지 동원해서까지 재빨리 입국하고 싶어했던 이승만의 간절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점에서 45년 10월 4일 도쿄에서 맥아더, 이승만과의 회합은 매우 중요하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전략적 목표에 대한 사전 동의가 없었다면 결코 귀국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3자 회동은 그간 번번히 한반도 신탁통치를 주장해왔던 국무부의 대소 협력주의(국제주의) 를 못마땅해한 현지 군인들이 한반도에 대한 단독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내의 정치인과 처음으로 손 잡은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국내에 입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등을 조직해 우파통합의 기반을 다져놓게 된다. 적어도 하지의 셈법과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하지에게는 신탁통치 문제가 자신과 미군정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시련이자 기회였을 것이다. 모스크바3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내키지 않는 '조선과도임시정부'를 소련과의 협의 아래 구성해야 할 상황에 놓인 미군정은 작년 11월에 귀국해 이승만에 버금가는 위상을 차지한 김구 및 임시정부에 의해 기회의 카드를 잡았다. 이 애국심과 민족주의로 뭉친 집단이 동아일보의 오보를 계기로 신탁통치에 대한 전면적 거부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는 김구가 국자1호와 같은 행정권 접수를 위한 쿠데타만 아니라면 김구의 강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겉으론 당혹스럽게, 속으로는 반기며' 소련에 대한 여론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미군정은 남한의 반탁여론을 이용해 동아일보에 의해 조작된 소련의 '음흉한' 의도를 남한정치 세력의 입으로 폭로하는 것을 이용했으며, 미군정의 시책에 반대하는 미국부의 관료들을 이러한 여론을 활용해 고립시키려고도 하였다. 보다 못한 소련의 타스통신이 모스크바3상회의의 진상을 공개하며(신탁통치는 미국이 주장한 것이었으며, 이는 국무부에 의해 42년부터 입안되고 있었다) 미군정의 여론관리에 대해 전면 반발하지 않았으면 하지의 음모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하지는 그러면서도 계속 우익강화, 좌익약화의 전술을 사용했다.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은 하지의 정치고문 굿펠로우가 주도함으로써 우익통합체에 입법권을 부여하는 단계로까지 발전시켰다. 끝까지 대표성 문제로 시달리고 결국엔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지만 이 단계에서 하지와 굿펠로우는 좌익통합에 앞장섰던 여운형 같은 이를 삼고초려할 정도까지 민주의원에 대표성을 부여하려 했지만 여운형은 이에 끝까지 응하지 않아 결국은 우익통합에 그치고 말았다. 이승만은 웃을 수 있었고, 미군정의 의도는 그치지 않았다. 우익만의 통합일지언정 최고정무위원회-입법기관 설립과 남한만의 정권수립이라는 선명한 흐름이 가능함을 우익세력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미소공동위 성공이라는 미국무부의 방침에 일정 호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하지는 미소공위가 교착하자 김규식과 여운형을 앞세워 좌우합작을 시도했고, 이것은 거대한 노선전환이었지만 좌우합작이 성공한다해도 미소공위의 성사를(조선과도임시정부 수립)그대로 수용할 입장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광산스캔들로 실각한 이승만은 대놓고 미소공위의 실패를 주장하고 다녔고, 하지는 계속해서 배후에 있었다. 결국 이승만의 집요한 단정공작에 대한 묵인, 미군정 그 자체의 설계, 닉슨 독트린이라는 대소 강경주의의 득세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하지는 단정수립의 길로 한국을 이끌어가는 가장 주요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45년 9월부터 48년 8월까지 하지가 남긴 정책은 명백히 실패한 것이었다. 통일정부수립이라는 한국민의 간절한 열망을 실현시키지 못한 것과 더불어, 비정상적일만큼 극우파를 등용해 사회경제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다. 이 또한 한국민의 자력 수준을 탓해야 하지만 그러기엔 하지의 권한이 너무 막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막강했던 하지는 군정이 끝난 이후 별반 주목받지도 못한 채 미국으로 건너갔고, 아직도 일본인들에게 추앙되는 맥아더와는 달리 이후의 행적조차 별로 기억되지 않는 불운한 인생으로 살아가야 했다. 


'historical 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봉암 연구를 읽고  (0) 2019.01.29
<다시 보는 8.15인물 열전- 이승만과 존 하지>  (0) 2019.01.29
김육과 노블리스 오블리제  (0) 2019.01.29
한명회  (0) 2019.01.29
김일성의 귀국과 조선공작단  (0) 2019.01.2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