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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view

조봉암 연구를 읽고

by 이시대 2019. 1. 29.

조봉암 연구를 읽고

김동환의 人文일기 2014/07/28 00:08 이시대








조봉암이란 인물을 처음들어본다거나 그 정치적 행보를 아예 모른다거나 하진 않더라도, 이번 기회에 조봉암과 진보당의 노선을 다시 한번 살피고자 박태균의 '조봉암 연구'를 독해했다.

지난해 대법원은 비로서 진보당 사건이 조작사건이었음을 판명하고 조봉암에 대한 복권을 시도했다. 그 후로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조봉암 노선을 공부하고, 사회민주주의를 당의 강령으로 재설정하려하는 시도들이 있던 만큼 '진보당 사건'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강령과 노선을 기초하고, 이승만과 한민당, 민국당에 대항하는 선명 야당을 구축하려 한 조봉암 노선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제3지대 정당을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지 일정부분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 그 핵심에 <인물>이 빠질 수 없으나 이 페이지에서 서술하지는 않는다.

조봉암의 정치활동을 개괄해보면,

1. 3.1운동 참가 후 서대문형무소 수감, 일본 주오대학 정경과에 입학해 박열 등과 함께 사회주의 단체 흑도회를 조직.

2. 귀국 후 제 1차 조선공산당의 주류인 화요계 인맥 속에서(김찬,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 정치활동을 시작

3.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의 연결을 위해 파견을 나갔던 중 검거선풍으로 인해 만주에 머물르며 만주총국을 설치 책임비서로 선임.

4. 상해로 이동 한인반제동맹을 결성해 활동하다 체포, 압송되어 6년 간 수감.

5. 39년 출옥 후 해방까지 휴식기를 거쳐, 45년 인천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으로 취임하나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 라는 편지글을 통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과 결별 선언. (조봉암의 전향은 미군방첩대와 긴히 연결됨)

6. 반공노선을 천명한 가운데, 단독선거에 참여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됨, 이후 농림장관 및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현실적인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줌.

7. 이승만의 발췌개헌안을 지지하는 등 오히려 한민당-민국당 계열의 정치세력과 마찰이 큼, 52년 대선을 통해 정치적 입지 상승.

8. 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겠다 선언하나 그로인해 민주당 추진세력이 분열됨. 결국 혁신계, 진보세력과의 <광릉회합>을 통해 '진보당 창당추진위원회'를 구성 56년 대선에 참여했으나 2위로 낙선, 엄청난 여파를 몰고옴.

9. 58년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문제삼아 소위 '진보당 사건'이 발표됨. 별건이었던 '양명산 간첩사건'을 조봉암과 연계해 조봉암과 양명산에게는 사형 구형, 평화통일론은 무죄로 판결.

10. 조봉암 59년에 신속히 처형되나, 진보당 노선은 4.19이후에도 계승됨.

개괄에서 알 수 있듯 조봉암은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해있었으나 해방 이후 누구보다 반공적이며, 현실적인 정치행보를 그린 것으로 보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살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이승만에 대항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다는 대목을 피할 수 없으며, 전향에도 불구하고 보수양당체제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이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견제받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

허나 분명한 것은 당시 시대에서 어떤 정치세력도 주장할 수 없었던 '평화통일론'과 '경제민주화' 요구들을 전면에 내걸고 자유당과 민주당이라는 거대양당 체제 속에서 제3세력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선명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유효함. 비록 진보정당들이 그 역할들을 대신하고 있으나, 과거의 진보당이 가졌던 영향을 왜 갖지 못하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고찰해 봐야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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