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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view

<다시 보는 8.15인물 열전- 이승만과 존 하지>

by 이시대 2019. 1. 29.

<다시 보는 8.15인물 열전- 이승만과 존 하지>

김동환의 view 2014/08/21 00:23 이시대






<한번 더 보는 8.15 인물열전 2-이승만과 존 하지>

"북한군이 내려오고 있으나 국군이 반격을 개시했으니 안심하라" 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피신한 이승만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신을 계속할 예정이었다. 이승만은 북한군의 남하를 잠시나마 저지하기 위해 한강다리를 폭파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선조의 환생이란 평가를 남겨주었다.

하필 시대가 너무 복잡하고, 한명의 영웅이 발생하는 상황을 완벽히 대처하기엔 너무나 곤란한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선의 의지라 하더라고 상황은 악화될 수 있었으며, 악한 의지라도 상황을 좋아지게 만들 수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최대한의 너그러운 환경을 조성해놓고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승만은 결국 권력 경쟁에서 1인자가 되었다. 사심을 포장하려 하지도 않았고, 의지는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독립협회의 청년리더는 작은 역할이니 그렇다하더라도, 탄핵되어가면서까지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자임했고, 기나긴 미국유학 생활 중 박용만과의 갈등을 끝내 이겨가며 미주한인사회의 1인자가 되기를 애썼고, 끝내는 입국해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섰다. 간절하면 이뤄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다.

이승만은 1875년에 5대 독자로 태어났다. 전주 이씨로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태어난 것은 이승만의 생을 지배하다시피 했는데, 나는 단순한 이 사실이 이승만을 이해하는 가장 유효한 코드라고 본다. 그가 고종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비춘 것은 표면적으로는 청과 러시아를 보호막으로 점진적 개화를 고수하는 고종의 시책에 대한 반감일 수 있지만 난 그것보다 스스로가 왕족이면서도, 몰락한 처지에 있었다는데 대한 원망이 고종에게 표출되었을거란 해석에 더욱 무게를 둔다. 하지만 아주 부족한 가계도 아니었으며, 자라는 환경도 그의 귀족의식을 보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서울로 이주해 살면서 교육을 받은 것은 그에게 기호파 인사라는 엘리트 귀속감을 줄 수 있었는데, 평생 서북파라는 지방색이 따라붙었던 안창호와 비교했을 때, 권력획득에 있어 더 안정적일 수 있었다.

과거제도 폐지에 따라 배재학당에 입학한 그는 발군의 영어실력과 더불어 기독교를 깨우쳤다. 와중에 고종을 궁 밖으로 빼내고 김홍집 내각의 대신들을 살해해 친일내각을 개편하려 했다는 혐의인 '춘생문 사건'으로 피혐되나, 개입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화를 모면하게 된다. 이후 독립협회와의 협력 하에 서재필과 협성회를 이끌며 민권운동을 시작하여 만민공동회를 이끌어내는 등 개혁적 청년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주나 다시 박영효 쿠데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1899년에서 1904년까지 장장 5년 7개월을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개혁' '개화' '실력양성' 이라는 수식어가 매우 잘 어울리게 행동했던 그와 이후에 활동할 그가 왜 그렇게 다른지가 이승만을 볼 때의 어려운 점 중 하나다.

러일전쟁 와중인 1904년 석방된 그는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한다. 옥중에서 선교사들의 열정적 구명운동이 그의 옥중 생활의 자유로움을 가져다주었고, 이후 미국에서 석박사까지 6년이라는 최단기 코스를 밟은 것도 모두 선교사들이 이승만을 키워주기 위한 노력이었을만큼, 이승만은 어찌보면 축복받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또한 미국유학의 다른 한가지 측면이 있다면 민영환, 한규설의 개인밀사로서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에 대한 문호 개방 정책을 청원하는 일이 그의 과제였다. 이때 이승만은 루즈벨트와도 만남으로서 이승만=외교달인 신화의 길을 열어두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간의 저력은 정치권 내에서도 이승만의 위치를 향상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1919년 3.1운동 이후 선포된 임시정부는 총 8개인데 그는 모두 국무총리급에 추대되었고, '위임통치청원' 문제와 '대통령 사칭' 문제로 결국 탄핵되어야 했지만, 이때도 역시 국무총리였다. 이승만이 이 당시 이렇게 선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파리강화회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의 사조가 독립운동진영 전반을 자극했고 이런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통치가 장기화 되고 일본의 전쟁도발, 군사기지화가 심해지면서 이러한 '외교독립노선'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이승만 역시 정세변화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미국에 위치하며, 한갓 미주사회의 주도권 문제로 다툼을 일삼는데 시간을 보내야했지만, 상당수의 독립운동가에게 있어 이승만의 존재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외교'는 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봐야할 것이다. 일제와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만주의 한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심지어는 한국 내 비타협주의자들 조차 어리석다고 보았다. 그만큼 그의 국내 지반이었던 배재학당 계열과 그들이 중심이 된 흥업구락부는 '친자치'로 경도되는 상황까지 발전했는데, 나는 이승만의 일련의 과정을 보건데 그가 입국 후 친일혐의가 짙은 '경제보국회'를 통해 막대한 정치자금을 조달한 일이나 정부수립 이후 반민특위 파행의 실질적 배후로 지목된 것을 봤을때 그의 국가관과 민족관에 대한 약간의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은 1920년~45년까지 독립운동가 이외에 한국민의 기억 속에서 별반 자리잡지 못했다. 그러나 45년이라는 기회는 누구보다 그에게 가장 빨리 찾아왔다.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그는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주미외교위원부를 창설하여 사설 로비스트들을 활용, 41년부터 본격적인 대미외교에 나섰다. 주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해 주미외교위원부를 정식 망명정부로 격상시키려 시도하였는데, 미국 국가주의자들의 입맛에 맞게 미국과 영국의 얄타밀약을 언급하며, 대소련 강경주의자들을 자극시키는 전술을 폈다. 미국이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기려한다는 얄타밀약은 물론 이승만의 거짓 선전이었지만 적지않은 '이승만 선전 효과'를 보았고, 결국 이는 임시정부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중경에 있던 '본부'는 이를 뜬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45년 해방이 되자 이승만과 일단의 그의 그룹은 귀국할 채비를 서둘렀다. 미국에서 단파방송을 통해 미일전쟁의 전개를 방송한 것은 그에게 '정보보유자'의 위상을 안겨주었다. 국내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단파방송을 통해, '위대한' 애국자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얼마든지 정치에 있어서 주도권을 허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그의 입국을 빨리 허용하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반소활동을 보건대 그의 활동이 (미국의 계획이 포함된) 한국의 장래를 어둡게 할 것이란 전망을 미국무부 관리들은 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접촉한 것은 일본의 GHQ, 맥아더 사령부였고 미군정의 이해와 일치한 이승만은 융숭한 대접을 받고 한국행을 할 수 있었다.

과연 한국에 온 이승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대중적으로 막강히 성장한 여운형, 박헌영 등은 9월 인민공화국의 선포하고 허울 좋게도 자신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인민공화국은 항일운동에서 탈락한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각료 구성과 인민위원 배치에 있어 우익세력이 초기부터 배재가 되었다. 주석이 되어달란 말인즉 허수아비가 되어달라는 말과도 같았다. 이승만은 즉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를 결성해 우익통합에 나섰는데, 인민공화국과의 대립을 선포한 '한국민주당'은 표면으로, 미군정은 배후로 그를 강력히 지지하면서 격랑의 한복판에 복귀하게 된다.

이승만은 그 이후로도 우익통합에 치중하고,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시책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신탁통치 국면에서도 김구와 같은 도발적 자세를 취하지 않았으나 46년 초반부터 미소협력 불가와 단정노선을 측근들에게 제시하는 등 미군정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비타협주의를 주장하다 미 국무부와 심지어는 하지에게 조차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하지는 이승만이 도를 넘어 무모하다고 생각했고, 시간이 지나자 한국의 숨은 애국자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있었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입국 전 도서관을 뒤져 한국에 대해 철저히 공부하고 온 버치 중위는 특유의 정치력으로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보다 좌우합작을 지지했던 김규식과 하지의 관계를 좁히는데 더욱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국면에 와서도 이승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 미군정은 미국무부의 대소협력 방침을 전면적으로 거부할 입장이 되지 못하였고, 국무부의 시책으로 대소협력주의의 길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하지의 이런 어정쩡한 상태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하지와의 상의 아래, 미소공위를 흔들기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반소반공을 선전했고, 여기에 추가해 반하지 선전을 하기 시작했다. 좌우합작을 성원하면서도 한쪽으로는 이승만을 성원했던 하지를 위기에 빠뜨려 정치적 우위를 점하려 했다.

또한 국내에서 이승만은 본격적인 독자노선을 시작한다. 이승만은 미소공위의 실패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언제나 김규식과 같은 좌우합작파를 흔들 준비가 되어있었다. 결국 측근이었던 굿펠로우의 단정발언을 시작으로 이승만은 전국을 돌며 반탁과 단정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김구가 강한 영향을 가지고 있었던 지방조직을 흔드는 남선순행을 통해 김구의 영향력을 잠식하고, 미소공위의 완전한 파행을 기도한 결과 단정수립이라는 그의 노선을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부상시킬 수 있었다.

그는 그 이후로 한번도 1인자 자리를 뺏기지 않았다. 미소공위, 좌우합작이 파괴된 후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 김규식과 좌우합작파들은 남북협상이라는 비현실적이지만 '최후의' 모험을 했고, 박헌영과 남로당계 등 그의 진정한 '이념의 적들'은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면서 대거 북한으로 올라갔다. 48년 5.10선거 이후 제헌 의회는 그를 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그리고 기어이 대통령에 오른 그는 이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편법, 탈법, 협박을 동반한 온갖 수를 부리지만 집권 12년 만에 민의에 의해 대통령직을 내려놔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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