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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view

6.10만세운동의 중요성

by 이시대 2019. 1. 29.

6.10만세운동의 중요성

김동환의 人文일기 2014/06/16 00:25 이시대






오늘이 6월 10일이라 그런지 sns상에 6.10이야기가 많이 올라옵니다. 6월 항쟁을 승리적으로 끝내고 탄생된 그 놈의 6월 체제가 뭔지, 이젠 6월 체제를 극복해야한다는 주장도 많긴 한데 꽤 크게 공감되는 것은 국회의원의 정수를 확대하자는 주장입니다. 1987년에서 아마 의원정족수가 한명 증가해 현재는 300명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그간 인구가 얼마나 증가했으며, 사회의 각 영역이 얼마나 세분화되어 있는데 지금의 대의구조를 갖느냐는 것이죠. 비례대표제의 확장도 이 의원정족수 증가와 맞물려 계속해서 논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튼 다들 이 87년의 6.10을 이야기 하는데, 저는 훨씬 더 과거의 6.10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26년 4월 25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52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1919년 고종의 승하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듯, 아직 군주제의 관성이 남아있던 조선 사회에서 순종의 승하 역시 '누군가에게는' 더욱 강한 정치적 자극을 주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19년의 3.1운동이 비타협성은 강했지만, 운동의 핵심이 준비되지 않아 민중이 탄압에 직면했을 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고 주도세력역시 해외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교훈 삼아, 순종의 승하에는 더욱 조직적인 방식의 운동을 전개하려 했습니다.

만세운동의 준비흐름과는 별개로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는 송학선의 의혈투쟁이 있었지만, 일제는 항쟁의 흐름을 전혀 잡지 못하다가 6월 7일에 와서야 조선공산당의 핵심이었던 권오설을 체포하면서, 6월 10일의 거사를 사전 입수하게 되고, 항쟁을 원천봉쇄했다는 자신감에 들떠있었습니다. 권오설은 '6.10운동지도특별위원회' 를 조직하고, 그 내부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설치해 시위를 기획할만큼 주도적으로 6월 10일에 대비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러나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3.1운동 이후 최대규모의 항쟁은 권오설을 비롯한 핵심그룹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제2선을 이루고 있던 학생 그룹을 통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3.1운동과는 달리 납세거부, 일제 공장 하의 총파업, 일본인 지주로의 소작료거부, 의무교육 실시 등 진보적인 구호를 내세운 것으로 보아 제2선 역시 사회주의자들의 요구에 손을 들어주는 모양새였습니다. 마치 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정치적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면, 그해 7월, 8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계급적 요구가 분출했던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봅니다.

여튼 이 6.10만세 운동은 운동의 주체가 사회주의 그룹으로 해석된다는 점에서 3.1운동에 비해 마치 그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서술되고 있는데, 이 운동을 통해 점차 일제의 통치와 타협해나가던 민족주의자들을 걸러내고, 신간회의 탄생같이 좌우합작의 가능성을 열어놨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항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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