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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처절하게 독서하기> 미국의 대통령

by 이시대 2013. 3. 25.

 

 

미국의 대통령(제임스 터랜토, 레너드 레오, 바움, 2008)

“전 세계의 지휘자, 미국 대통령”

일전에 『누가 미국을 움직이는가!』통해 미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룹, 이들의 성향을 간단히 알아본 바 있다. 하지만 한 사회를 보다 입체적으로 알기 위한 작업으로는 너무나 부족함이 많았다. 비록 사회를 이해하는 작업이 책 한두 권으로서 될 일이 아니고, 그렇게 돼서도 곤란하겠지만, 꾸준하게 공부하고 연구하는데서 위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요즘의 필자의 책 읽기는 ‘국가에 대한 이해’가 중심에 있다. 인접 국가를 중심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내용들을 파악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중요한 것이 미국이다. 중언부언 할 필요 없이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나라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주한미군의 행방에 따라 한반도의 정세가 요동치는 만큼 누구한테는 구세주가 되고 누구한테는 지독한 콤플렉스로 남아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한반도가 미국에 영향을 끼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저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조약 이래, 미국과 한반도의 관계는 언제나 비대칭이었다. 이러한 역학관계의 반영이 친미-반미의 구도로 나타나고 이는 굳이 한반도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허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이러한 구도의 사슬에 지나치게 입각하기 보단 한명의 관찰자가 되어 나라를 이끌었던 대통령들에 대한 파악을 해보도록 하자. 단, 지켜볼 대통령들은 초기 건국에 이바지했던 대통령과 이후 한반도와 직간접적인 영향을 발휘했던 대통령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미국 국민들이 다른 나라와 약간의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지도자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 리더십이 있는 인물들에게 애정을 표시한다. 때문에 리더십에 대한 연구결과가 가장 많이 축적된 곳이 미국일 것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리더를 본 받고자하고, 리더들은 하나같이 도덕적일 것이란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있다. 클린턴(재임기간:1993년~2001년)의 성추문이 불거지자 바로 등을 돌린 것도 미국 국민이었다. 오히려 훨씬 더 위험하고, 국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정책적 오류를 저질러도 대통령 개인의 도덕성이 추락하면 끝장나는 것이다. 역사상 대부분의 대통령은 그런 도덕적 추락만은 비켜갈 수 있었고, 존경의 대상으로 남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국 사람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은 건국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재임기간:1789~1797)이다. 1776년 독립을 선언한 미국에 대응해 영국은 토벌군을 파견하지만 이러한 공세를 물리치고 독립을 이끈 전쟁영웅은 기본적으로 존경할만한 것이었다. 또한 검소한 생활과 근면함으로 특히나 사랑을 받았고 미국의 민주주의가 크게 흔들리지 않고 발전할 수있게 해준 공로를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워싱턴을 비롯한 건국의 영웅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놓은 대통령제는 아직도 대부분의 나라가 ‘왕권신수설’에 빠져 민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인류 최초로 민의에 기반 한 정치적 작품이었다. 비록 첫술에 배부르진 않겠지만 이는 꾸준히 발전하여 가장 안정화 된 정치시스템을 가진 나라로 만들게 된다. ‘대통령직’에 대한 권위를 실어주고, ‘중도통합’의 정치를 실현하려는 워싱턴의 의지는 후대에 계승되어 역대 대통령들은 늘 미국을 중도통합형으로 끌고 나가려고 했다. 게다가 충분히 종신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련 없이 대통령직을 마무리한 것은 감동적인 장면이다. 물론 워싱턴을 선의의 의지만 가진 인물로 파악하는 것에도 문제는 있다. 그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 방해가 되는 정적에게 있어서는 단호했으며, 그 자신도 정파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의 역사 전개는 어떠한가.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원주민들을 살해해나가며 건국한 ‘백색건설’ 아니던가. 이러한 한계점들이 존재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그래도 워싱턴을 칭송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계를 바라보기 보단 업적을 강조하는 풍토는 계속 이어진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6대 대통령에게로 가보자. 제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험 링컨(재임기간:1861년~1865년)은 워싱턴 이상으로 세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일 것이다. 한국의 노무현 前대통령도 링컨과 같은 대통령으로 남고 싶어 했을 만큼 위인으로 추대되고 있다. 하지만 링컨만큼 힘겹게 대통령직을 수행한 사람이 있을까? 조용하고 때로는 침울해보였던 링컨 대통령은 자신 앞에 닥친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누구보다 극심한 고통을 받았지만 그가 가진 특유의 끈기는 마침내 그를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861년 2월, 노예제 반대론자인 링컨의 당선이 확실시 될 즈음, 남부의 7개 주는 연방을 탈퇴할 수순을 밟고 있었고, 남부동맹 건립을 선언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섬터요새를 구축한 남부동맹과의 갈등은 계속 커져만 갔고 어떡해서든 미연방을 유지하려는 링컨은 마침내 남북전쟁을 개시했다. 남부동맹, 북부동맹과 민간인 총 110여만 명이 사망한 큰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부동맹의 반쪽 대통령 링컨은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통해 일약 노예해방의 스타가 된다. 미국 전체를 피로 물들인 책임이 결코 가볍진 않지만 전쟁의 승리는 그러한 책임을 덜게 해주는 것 아닌가. 노예제 폐지를 진정으로 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폄하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방을 구했으며 나라를 한데 묶었고, 자유를 탄생시켰다. 게다가 피살을 당해 순교자처럼 숨을 거둔 짠한 스토리는 누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 속에는 아주 조용하고 우울한 사람이었던 링컨이 있다.

 

 

 

시계를 좀 더 빨리 돌려보자,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대신 일본의 조선반도 점령을 묵과해준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도 패배감을 안겨준다. 밀약의 주체였던 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재임기간 1909년~1913년)는 굉장히 유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혐오한 것으로 보인다. 정파 간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했으며 루즈벨트와의 갈등은 언제나 자신에게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는 타고난 법률가로서 대통령 시기보다 오히려 대법원장, 법무부 차관으로서의 재직이 그에게 행복을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이렇다 할 특별한 리더십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해박한 법률가답게 자신이 통솔하던 제도들의 권위를 높였다는 평을 듣는다.

 


이제 태프트보다 좀 더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지녔지만 평가가 안 좋은 대통령을 만나보자. 민주당에서 배출한 대통령으로서 가장 비(非)민주당스러운 정치스타일을 보여준 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재임기간:1913년~1921년)은 대부분의 민주당원이 고립주의자였던 것과는 달리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에 가까웠다. 미국 외의 세상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리저리 관여하기 일쑤였던 그의 모습은 후대에 몇 번에 걸쳐 재연 되고 만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라 부른다. 윌슨은 공부에는 무관심했지만 학생 때부터 리더로서의 활동을 해왔다. 그러다 정치에 눈을 뜬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타고난 정의감이 때로 화를 부르는 법이다. 다른 나라에 대한 지나친 개입은 외교를 파탄의 지경까지 몰고 갔기 때문이다. 아이티를 점령하고, 멕시코의 반군 지도자를 추격했지만 오히려 멕시코와의 전쟁위기까지 몰고 갔었다. 이후에도 숱한 개입을 통해 윌슨은 자신의 이상주의를 현실화시켜 나가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봐야했다. 이러한 와중에 나온 것이 민족자결주의 같은 것들이다. 식민지의 민족해방투쟁을 지원하는 것으로서 세계 식민국가에 커다란 힘을 실어주었으나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해 참석한 파리평화회의에서 미국은 약소국의 해방요구에는 묵살함으로서 그 본질을 드러냈다.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있던 이승만 前 대통령도 윌슨의 이상주의를 지나치게 믿었는지 한국의 ‘위임통치’를 부탁했다가 크게 혼쭐이 나지 않았던가. 윌슨은 외교적 실패는 고스란히 강력한 유산으로 남았다. 미국의 정치는 실패에서도 자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이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뛰어난 대통령 중 한명이라 평가받는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재인기간:1953년~1961년)다. 미국 사람들이 애칭으로 표현하는 ‘아이크’는 그에 대한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재임 중 진정으로 국민을 아꼈으며 사랑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당선되자마자 숱한 문제를 껴안아야했다. 우선 당장 할 것으로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한국전쟁을 속히 종결시키기 위해 휴전조약을 이끌어냈다. 당시의 호전론자들에겐 전쟁이 이렇게 흐지부지 끝난 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지만 그는 소련과 유럽과의 관계를 더 고려해야만 했다. 소련도 소련이지만 유럽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유럽단일체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인종문제와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의 언행으로 정국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특출한 군인적 리더십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그는 처음에는 다소 능력 없는 군인으로 비춰졌다. 세계 2차 대전 직전에야 중령에 오른 그는 하지만 5년이 지나 오성장군이 되어 있었는데 타고난 능력이 있음을 군부가 인정했던 것이다. 전쟁 후 영웅으로 돌아온 그는 친근하게도 평화를 보존하는 일에 앞장섰다. 전쟁의 공포와 공허를 잘 알고 있는 그는 갈등요소를 최대한 피하면서 UN의 합의를 중시했다. 때로는 주변 강대국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약소국들에게 지원해줌으로서 전쟁영웅에서 평화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인들이 아이크를 사랑하는 이유다.

누군가는 이같이 단지 몇 명의 대통령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전에 이야기 했듯 어떤 나라에 대한 혹은 인물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의 시도는 늘 파편화되고 조각된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통령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곧 세계의 흐름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대통령들에게 존경을 표함으로서 ‘강대국 미국’에 대한 자부심을 표출하길 원한다. 때로는 오만한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는 대통령을 추대하기를 꺼리는 모습들을 더 많이 본다. 물론 우리가 뽑았으니 밀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로 논리가 귀결되는 것은 곤란하다. 필자는 그 결정적 차이로 미국과는 사뭇 다른 건국과정, 또한 공화제를 도입하는 데에 있어서의 미성숙함, 초대 대통령의 독재적 통치가 현재를 만든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며 미국의 자부심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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