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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처절하게 독서하기> 13억 중국의 CEO! 후진타오를 알면 중국이 보인다

by 이시대 2013. 3. 25.

 

 

 

13억 중국의 CEO! 후진타오를 알면 중국이 보인다.(마링, 리밍 공저, 시인의 마을, 2003)

“도광양회(韜光養晦), 중국호 선장 후진타오”

중국의 3세대 지도부라 불리는 장쩌민, 리펑, 주룽지, 이른바 3세대 트로이카는 정치적 퇴진을 앞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중 단연 중국 국가 주석 장쩌민은 후계체제에 대해 말 못할 시름이 깊어졌다. 장쩌민 자신이 일선에서 후퇴한다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지만 후계체제에 자신의 영향력을 깊숙이 주입해놓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나 약간 껄끄러운 문제가 하나 남아있었다. 정계 각처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놓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막상 후계자로 거론되는 후진타오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 드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진타오는 애초에 덩샤오핑에 의해 지목된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얼마만큼 주입할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이미 언론이나 인물들은 자신보다 그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고민도 잠시, 이내 장쩌민은 안심했다. 후진타오가 생각보다 온순하고, 예의가 깊어 신뢰가 생겼다. 인간적으로도 신뢰가 생기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쩌민이나 후진타오나 중국 최강의 권력자들의 다툼이란 그렇게 이미지로서 대변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장쩌민의 칼이 무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수 위의 백조처럼 두 사람은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직한 이야기 일 것이다. 그렇게 등장한 4세대 지도부 후진타오를 공부함으로서 중국에 조금씩 더 다가가 보자.

우선 중국의 체제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정치는 중국공산당의 1당 독재 체제가 유지되고 경제는 이미 시장에 맡겨버린 것 같은 형국이다. 때문에 시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개혁 요구를 공산당이 처리하는 다소 형용모순적인 모습을 보여 시장의 압박이 그만큼 커져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시장이 점차 개방되면서 본질적으로 내부에 개혁에 대한 압박이 커질 수밖에 없다. 누가 개혁, 개방을 강요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게 양국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같은 공산당 지배국가라 하더라도 차이를 보이는 것은 중국의 정치는 집단지도체제를 잘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치의 이미지가 공산당 1당 독재임에도 불구하고 보이기 좋게 희석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미지를 한층 강하게 만든 후진타오는 어떤 인물일까?

 

 

 

 

2003년 예정된 수순처럼 후진타오가 국가 주석에 오르자 중국 언론 및 외신들은 경악하거나 흥분하기보단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후진타오가 안정된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나 가장 최연소의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왔지만 전혀 튀지 않는 처신은 잘 생긴 외모와 함께 호감의 원인으로 작용해왔다. 파벌정치와 인치(人治)가 중요한 중국 정계에서 특출한 능력을 타고난 이들의 처신은 어쩌면 마땅히 그래야 했는지도 모른다. 후진타오는 상대적으로 그런 요소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는 샹하이방(파벌)에 속해 있지도 않고, 원로들의 자제인 태자당(太子黨)에 속하지도 않은 정치가로서는 처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꼭 정략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42년 장쑤 성 타이저우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활달한 성격이지만 언제나 예의 있게 생활했던 것 같다. 지역 엘리트 상인이었던 조부 후빙헝은 교육에 남달리 신경을 썼다. 부친 후쩡위도 마찬가지여서 언제나 후진타오에게 부지런함과 근면함을 강조했다. 이후 중국 최고의 명문 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입학하여 무용대 대장, 예술단 단장 등을 맡으며 정치 경험을 쌓게 된다. 특징으로 ‘문화대혁명’이 활발할 당시 그는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는 ‘소요파’가 됨으로서 앞으로도 이어질 그의 처신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공계열 출신인 후진타오가 국가 주석에 오르면서 일시에 중국은 ‘테크노크라트’가 중요한 사회가 되어간다.

이후 후진타오는 승승장구했다. 졸업 후 배치된 깐수 성 건설위에서 부주임을 맡고, 이듬해는 중국에서 막강한 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서기 또 잠시 뒤는 공청단의 총책임자인 제 1 비서가 되어 중앙 정계에 알려진다. 이때의 나이가 42세 밖에 안 된다. 이듬해에는 주이저우성의 서기, 1988년엔 시장 자치구(티베트)의 서기가 되어 요직을 차지한다. 때문에 지역에서는 늘 빠른 승진을 놀라워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이 과잉으로 가지 않은 것은 다시 그의 처세와 연관이 있다. 항상 과묵한 행보를 보이며 자신의 주장을 함부로 이야기 하거나 정적을 만드는 일을 최소화하고 있던 것이었다.

1992년 후진타오는 7명으로 구성된 최고지도집단인 정치국 상무위원에 최연소로 이름을 올린다. 능력과 더불어 정치 원로들의 관심에 들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89년 톈안먼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이후 원로들은 이러한 정치 변화에 매우 민감해하고 있었는데, 88년 티베트에서의 불안정을 단호하게 처리한 후진타오를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덩샤오핑의 영향이 가장 컸다. 1999년까지 중앙당교 교장, 국가부주석,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모두 장악함으로서 후진타오는 이제 그 자신이 최고 실력자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후진타오가 이끄는 중국은 지금 변화의 물결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미 선진국과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중국은 경제대국으로서, 군사대국으로서 위치가 확고해지고 있다. 후진타오를 비롯한 4세대 지도부가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개혁의 압박으로 빈곤층이 누적되고 티베트를 비롯한 분쟁 등이 문제로 남아있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 튼튼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중국추격론을 넘어 이제 한국이 중국을 추격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넘치고 있다. 이제 또 한 차례 중국의 변화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다가오는 2013년 포스트 후진타오 체제를 맞아 다시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장 확실하게 점쳐지고 있는 시진핑 국가 부주석과 후진타오는 역시 호수위의 백조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후진타오 체제에서 배제된 장쩌민이 시진핑을 통해 다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내막과 함께 말이다.

『13억 중국의 CEO! 후진타오를 알면 중국이 보인다』는 중국 국가 주석 후진타오의 일대기를 그린 책이다. 공학적인 수사를 하지 않고 편안하게 후진타오의 모습을 그렸다. 국가지도자를 CEO라는 표현을 사용한 책들은 대게 개인에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어 그런 부분만 비판적으로 수용하면 후진타오에 대해 더욱 잘 알 수 있는 책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노선이라 할 수 있는 도광양회(韜光養晦, 칼날의 빛을 칼집에 가두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후진타오, 그의 삶을 적절히 묘사해주는 단어다.

더 읽어보기
『후진타오 시대의 중국 정치』(조영남, 나남출판, 2006)
『그들이 중국을 움직인다』(류동희, 한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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