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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처절하게 독서하기> 약산 김원봉 평전

by 이시대 2013. 3. 25.

 

 

 

김원봉 평전(김삼웅, 시대의 창, 2007)

“잊혀진 항일영웅을 다시 복권시키다.”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身名)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5. 의백(義伯) 일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하지(何時何地)에서나 매월 일차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하지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함.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9. 일이 구를 위하여, 주가 일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반배(返背)한 자를 처살(處殺)함.

<7가살>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

<파괴대상>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외적 중요 기관

섬뜩한 단어 속에 의가 숨어있다. 이 강령을 통해 조직의 일원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앞장섰다. 신의로서 정신을 통일하고, 적에게는 한 치의 동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 단체에 대해 조선총독부 및 일제 관료들은 오금을 저려야 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을 비롯해 두려움으로 남았던 ‘의열단’은 이 단체의 의백(대표자) 약산 김원봉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다.

독립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다보면 가장 인상이 깊고, 시선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는 의열투쟁은 한국판 테러리즘의 전형이다. 당시 독립운동이 지독한 파벌주의와 그리고 이념적 대결로서 피로가 쌓일 때, 공리공론과 당리당략이 운동 전체의 사기를 저하시킬 때, 의열단원들은 손에 폭탄을 들고 적진에 뛰어 들어갔다. 부산 경찰서장을 폭사시킨 박재혁 의거, 김익상, 오성륜 주도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 의거,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의거 등으로 의열단은 일시에 정국의 태풍의 핵으로 부상했다. 그 의열 투쟁을 전개시킨 김원봉은 어떤 사람일까?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사람’이라는 짧은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할 듯 하지만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한 뒤 어느 날 돌연히 자취를 감춘 이 사나이의 삶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지도 못하고, 남북의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김원봉은 숙청설, 자살설 등으로 안타깝게 복권되지 못하고 아직도 가정의 영역에만 머무르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산실이라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의 삶 역시 그 행로가 미리 정해져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사회정세는 일본과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제의 한반도 진출이 본격화 되었고, 각종 수탈기구들이 나타났다. 망국의 한을 누구보다 깊게 느꼈는지 김원봉은 일장기를 학교 화장실에 처박아버리는 등으로 인해 학교마저 자퇴해야했다.

일제의 침략이 더욱 가시화되어 그 영향이 지방에까지 이르자 김원봉은 청년의 나이에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략을 마련하고자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이때부터 27년간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망명객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와중, 22세에 의열단을 창단하여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일반적으로 준비하던 무장독립에 힘을 보태고 더 나아가 의열 정신의 진수를 보여주는 폭력혁명의 길을 구체화 시키려 한다. 이때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투쟁의 정신을 듣고 감동한 단재 신채호는 유명한 <의열단 선언>을 통해 김원봉의 운동을 지지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중국 관내의 상황 변화에 따라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나 중국 내부의 파벌 및 이념 다툼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일도 많았다. 이러한 요인들은 독립 방략에 대한 차이점 이상으로 망명객들을 분열시키는 요소로도 작용하였다. 무엇보다도 김원봉이 의열 투쟁을 정립하려고 한 것은 국내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비폭력성의 한계에 대해 절감하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채택되고 있는 외교론, 준비론 등의 허구를 타파하기 위함이었다. 오히려 파리강황회의에 참석한 일본 대표단을 암살하기 위한 단원을 파견하기도 한 그는 확실히 적극 투쟁론자였다.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로서의 풍모를 갖고 있던 김원봉 역시 당시 독립운동의 방도로 유력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에 대해서도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안광천은 그를 좌향좌 하게 만드는 데 핵심적 인물이었으며, 함께 레닌주의 학교를 만드는 등의 활동을 했다. 전투적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운동으로 그리고 다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또한 임시정부 참여에서 북한 국가 건설 참여로 이어지는 선 굵은 행보는 훗날 김원봉을 남북에서 오갈 데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대게의 열정있는 애국 인사들이 그렇듯 독립에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사조라도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중국에서의 활동에도 적지 않은 어려움을 불러 왔음이 확실하다. 좌에서는 김원봉을 민족주의자요, 기회주의자로 보는 한편 우에서는 좌익인사로 색칠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원봉이 그 가운데 서서 독립운동의 진영을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전개했고, 공리공론에 치우치지 않아 상당한 위상을 지녔다는 것이다. 여전히 일제는 그를 두려워했으며 독립운동의 모든 진영은 그를 필요로 했다.

아직 해방이 되기 41세에 동지들을 모아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그는 그러나 이후 그의 위상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히게 될 결정을 한다. 조선의용대의 주력을 당시 중국에서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화북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망명자 수백 명을 돌봐야 했기에 자신은 관내에 남지만 그것을 이용한 중국 공산당은 의용대에서 김원봉의 영향력을 배제시킴으로서 유력한 의용대를 화북에서 직접 조종하려 한 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연안파가 되어 북 정권에 참여해 김원봉과 훗날 다시 관계를 갖게 된다.


 

 

 

자신과 의를 맺은 의용대원 다수가 떠나자 남은 김원봉의 위상은 재정립되고 있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남아 있는 대원들과 함께 좌우합작 노선을 살려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해방 이후 2진으로 귀국한다. 귀국 이후에도 세파에 중심을 잡지 못한 김원봉은 신변에 대한 위협과 북에 있는 동지들을 향해 월북을 결심하니 그것이 48년 9월 9일이다. 이후 북한의 국가검열상이 되어 정력적인 활동을 하던 김원봉은 6.25 이후 김일성에 의한 숙청의 물결에 휘말려 1958년 11월 역사의 모든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것이 그가 지금까지 남, 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복권되지 않고 있는 경로로 ‘가정’되고 있다.

『약산 김원봉 평전』은 그런 김원봉을 다시 역사의 무대로 복권시키려한 기념비적인 책이다. 의열 정신은 지금 읽어봐도 못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사람을 이끄는 매력이 있다. 그런 그를 읽는다는 것은 중요할 뿐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의의를 다시 생각해주게 한다.

더 읽어보기
『대륙에 남긴 꿈-김원봉의 항일역정과 삶』(한상도, 역사공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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