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ical view

의열단원들의 삶처럼

by 이시대 2019. 1. 29.

의열단원들의 삶처럼

김동환의 view 2014/03/09 00:21 이시대





3월 1일 이후로 머리속에 빙빙 도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엔 48년 통일정부의 수반이 되기도 할 뻔한 김규식 선생에 대한 일대기를 짧게 기록해보려 했지만이미 너무나 유명해서 그런지 '굳이' 라는 생각이 들고..한국의 현대사에서는 도무지 다룰 수가 없는 '조국광복회'의 권영벽에 대한 기록을 남겨볼까 하다 역시 무리수를 둔 다 생각하여 그만둘까 하다가,

우연히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본 문구가 생각나 책을 뒤적였다.

1930년대 당시 상해는 서울에서 넘어온 항일운동가, 만주에서 온 운동가, 미국에서 넘어온 운동가, 소련에서 넘어온 운동가들이 한데 모여, 정치정세를 토론한 '민족적 낭만'이 풍부한 도시였다. 27년 홍커우공원에서 벌어졌던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인해 조선인 청년들은 일제 정보망에 쫒기면서도 '회심의 반격'을 논의했고, 그 안에서 정서적 교감을 나눴다. 그 중 의열단원들의 삶은 특별한 것이었다.

이 장면을 본 항일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의 회상을 한번 살펴보자(165p)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했고, 수영, 테니스, 그 밖의 운동을 통해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중략---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됐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음으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막히게 멋있는 친구들이었다. 의열단원들은 스포티한 멋진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입었다. 그들은 사진 찍기를 아주 좋아했는데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는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조선 아가씨들은 의열단원을 동경하였음으로 수 많은 연애사건이 있었다. 이 아가씨들과의 연애는 짧으면서도 열렬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민족해방운동을 하다 이름없이 사라져간 이들이 죽음을 앞두기 전 보여줬던 단체에 대한 규율, 자신에 대한 사랑, 불타오르는 감정을 보면서 80년도 넘은 지난 일에 감정을 투영시킨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삶을 입체적으로 규명해보기를 시도할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