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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view

흥선대원군의 삶

by 이시대 2019. 1. 29.

흥선대원군의 삶

김동환의 view 2014/02/22 00:44 이시대




대원군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예전에 대원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척화에서 오는 고루함, 천주교 박해, 무리한 경복궁 중건에 따른 민중들의 삶의 피폐 등이었는데 역시 한 인물에 대한 삶을 함부러 재단해서는 안되는 모양이다.

서원 철폐와 호포제 실시, 세도정치 청산, 비변사 폐지는 그 당시에도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지금봐도 개혁의 최고수준이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섭정기간에 단기간을 통해 쌓아올린 리더쉽이 단단히 한몫했음을 알 수 있다. 민중들은 그의 말을 신뢰했고 섭정 이후 고종 친정시기 찾아온 국란기마다 그의 역할이 요구되었다.

이런 정치에너지는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과거를 보니 여실히 그 답이 나온다.
왕의 종친들이 명예는 있으나 실권력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대원군에게도 해당됐다. 그는 자의반 타의반 권력에 관심없는 행보를 취했고, 종친의 명예와는 상관없이 저잣거리에 나가 야인생활을 즐겼다. 권력의 중심이 보기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기에 그는 이 시기에 개혁방안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디선가 본 장면이다.

개국 초 조선의 이데올로그였던 정도전의 삶 역시 비록 종친은 아니었지만 벼슬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야인이 되었던 것 아닌가. 그러나 그는 이때 고려 사회를 뛰어넘는 '변혁적 구상'을 하고 있었다. 또한 가만히 생각하면 굳이 멀리볼 필요도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92년 대선에서 패배하자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 그전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한적한 삶'을 보내야 했다. 남들이 보기엔 외롭고 추워보였지만 그는 달랐다. 김대중은 영국 유학을 통해 자신의 외교구상을 체계적으로 공부 했고 국내에 입국해서는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어 최고수준의 인재들을 영입해 집권전략을 만들었다. 야인 생활을 통해 그 전과는 다른 수준의 인물로 거듭났던 것이다. 나는 그런 이유에서 최근의 손학규 대표나 이광재 전 지사와 같은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고통이 될 수도 있었고, 조급한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버티고 다듬은 이후에 꽃이 피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요즘 그 마음의 100분의 1정도는 이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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