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ical view

3.1운동의 국제적 성격

by 이시대 2019. 3. 2.

<3.1운동의 국제적 성격>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잠들기 전 잠깐 복기해본다.


자고 일어나면 그냥 세상이 바뀌어 있는게 아니듯 3.1운동의 발생 근원과 파급효과에 대해 주억거려본다. 너무 큰 오류가 있지 않은 이상 가볍게 지나치면 좋을 듯 하다.


3.1운동은 우선 그 기획과 파급효과가 국제적 성격을 가졌다는 점을 먼저 떠올려본다.


비교적 조직적 항일운동이 가능했던 중국에서는 이미 임시정부 설립 이전인 1917년부터 예관 신규식을 중심으로 '민족대단결선언'을 통해 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기관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여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다.


망명 정부구성이라는 '큰 일'이 논의되자 명망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가 중국으로 몰려들었고,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망명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커다란 지침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외교'로서의 독립운동방안을 구상한다. 이른바 '대외정세활용론'이다.


김규식, 여운형, 선우혁, 장덕수 등은 이미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1919년 1월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영어에 유창한 김규식을 파견하고, 여운형은 러시아에, 장덕수를 일본에 국내엔 여운홍, 선우혁 등을 파견한다. 이는 파리강화회의에 한반도 독립문제를 상정하기 위해 국제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사진 출처: 위키백과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장덕수는 일본의 최팔용을 비롯한 유학생들을 두루 접촉하여 파리에서의 정세를 설파한 결과 춘원 이광수로 하여금 초안을 작성케하여 일본 한복판인 도쿄 ymca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되는데 이것이 '2.8독립선언'이다. 운동의 지도적 관점에서보면 장덕수는 큰 성과를 얻은 것이었다. 허나 2.8독립선언이 국내 대규모 저항운동으로 이어질지는 그렇게까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은 국내로 파견된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과 선우혁, 김철 등이 이어받았다. 이들은 이제 일본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2.8독립선언이라는 성과와 파리강화회의 소식을 들고 약간 훗날 3.1운동의 '민족대표'들이 되는 인사들을 두루 접촉하여 태화관에서 집회를 열게 되니, 3.1운동의 발생 배경이 어떻게 국제성을 띄게 되는지 확인할 수 있겠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