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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view

김원봉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by 이시대 2019. 2. 10.

<김원봉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국가보훈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가 의열단 단장을 역임한 김원봉 선생(이하 김원봉)을 독립운동자로 권고하자 자유한국당이 색깔을 앞세워 반대하고 있다. 

한국당은 김원봉이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국가검열상에 된 것에 대해 예의 그렇듯 혐오의 표현을 쏟아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1948년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해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김원봉이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하더라도, 약간 훗날 박헌영의 남로당계 숙청과 58년 8월 김두봉의 연안계가 숙청되면서 김원봉도 58년 말 모든 정치적 직위를 박탈당하고 최후마저 불투명하다. 또한 6.25전쟁에서 그의 친인척 8명이 김원봉으로 인해 남한에서 총살 또는 살해된 바, 김원봉은 현재 남한 역사에서도 북한 역사에서도반가운 인물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쟁의 요소로서만 모두 소진될만큼 그의 경력이 절대 가벼운 게 아니다. 

일제의 경찰, 친일 관료, 주구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의열단의 의백(단장)을 역임하며, 외교냐 전쟁'준비'냐로 시간을 보내던 선배세대의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도심 한복판에서 테러를 감행했으며, 중국 망명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과도 대등한 합작을 도모했던 독립운동계의 거물로 성장한 역사가 그리 간단히 묻혀질 사안은 아닌 것이다. 

원로교수인 강만길 교수 역시 그의 저서 <조선민족혁명당과 민족전선>을 통해, 김원봉 등의 소장세력이 중국 내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김원봉과 그의 동지들이 중국 내에서 어떤 행보를 그렸는지 자세히 밝히고 있다. 임시정부가 '통합'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은 상해임정과 한성정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했던 1919년 후반과 김원봉의 세력이 합류했던 1942년 정도 뿐이다.

문제는 그의 생애에서 일부를 차지하는 48년 해방 후 정도가 될 것이다. 

김구 등의 기존 임시정부 세력과의 합작을 반대하고 화북으로 떠난 김원봉의 많은 동지들은 일본 정규군과의 전투가 치열했던 태항산에서 죽음을 맞고 김원봉은 잔류한 약간의 그의 사람들과 임시정부에 결합하여 1945년 12월 국내 2진으로 입국하게 된다. 입국 후 이승만 세력과 미군정에 의해 형해화된 임시정부틀을 벗어나 민족주의민족전선 등 좌파연합체와 정치행보를 함께 하나 6.25전쟁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던 박헌영의 남로당계와는 사상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함께 하지 않았다. 그런면에서는 오히려 여운형 선생과 비슷한 스탠스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여튼, 극 후반기의 행보로 그의 행보 전체를 매도할 수도 없으며, 북한에서도 숙청되어 주류 역사에서 배재된 김원봉.

생의 전반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는 그럼 대체 어디로 가야하는 건지, 어디로 갈 수는 있는 건지,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올해는 마땅히 살펴봐야 할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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