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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13

정파갈등의 역사성 ‪#‎1919년‬ 9월 한성정부, 블라디보스톡의 임시정부와의 통합으로 주요 각 정파가 총 망라되었던 상해임시정부는 채 2년을 가지 못하고 분열되고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결의와 탄핵이 추진되면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협성회와 반대하는 군사통일촉성회가 개최되었는가 하면 모스크바에서 임시정부로 보내던 정치자금이 배달사고가 나면서 내적으로 갈등이 심해지는 상황이 생겼다. 비슷한 시점에 간도에서는 훈춘사건, 자유시참변이 발생하면서 상해에 위치한 임시정부의 기능이 한계가 드러나 정부의 간도 이전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국민대표자대회'는 이런 내외적 갈등을 수습하고, 통합정부로서의 위상을 재구축하기 위해 1923년 1월 3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각계대표 124명이 모여 성립되었다. 최대의 독립운동.. 2014. 10. 11.
새로나온 도산 안창호 선생 평전 소개 책을 한권 선물 받았다.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 전 언론인이자 독립기념관장을 하셨던 김삼웅 선생은 요새 인물 평전을 많이 내신다. '박열 평전' '김상덕 평전' '김구 평전' '함석헌 평전' '조봉암 평전' '리영희 평전' '김근태 평전' ' 김대중 평전' 등 제목만 봐도 김삼웅 선생의 글쓰기의 시선이 어디있는지 알 수 있다. 문체 역시 독자가 알기쉽게 작성한 것을 보면 천상 글쓰기에 타고 나셨다.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 암튼 이번에 내신 책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 제목만봐도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 생기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내 독서편력이 드러나버린다. 제목도 절묘하다. 투사와 신사라는 대립된 단어를 써 안창호라는 인물의 맥락을 드러냈다. 아직.. 2013. 6. 3.
24일 다준다 연구소 강연에 초대합니다.^^ 2013. 2. 19.
<처절하게 독서하기> 백범일지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6) “김구 선생은 기억과 찬양으로서만 존재해야 할 것인가.” # 2009년 11월 21일 짓 굳은 날씨였지만 300여명이 모였다. 모두는 감동과 환희에 젖어있었고 웃음꽃이 활짝 피고 있었다. 축복스런 날이었다. 친일이 애국으로 변신하기엔 너무나 금방이었고, 항일투사는 다시 비적때로 몰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통탄할 우리네 역사가 오늘로 하여금 무언가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 같았다. 그곳은 백범 김구 선생 묘소 앞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 앞에는 3질의 책이 놓여있었다. ‘친일인명사전’, 평생을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다 안두희의 총탄에 스러진 백범 앞에, 아니 수 없이 많은 항일투사의 영전에 놓인 그 책은 지나간 왜곡의 역사를 이제나마 바로 잡기 위한 1.. 2013. 2. 10.
<희망을 주는 책 소개> 우리 역사 속 왜? 우리 역사 속 왜? 란 책이 주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려합니다. 저자들의 면면을 보니 언제나 소장학자의 길을 걸어왔던 사람들로서 내용의 신뢰성이 높습니다. 각설하면 여러 꼭지 가운데서도 임진왜란을 보는 관점이 중요해보였습니다 임진왜란을 국난극복의 관점에만 서다보면 위정자들의 무책임이 가려진다고 합니다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가한 정세인식을 했던 그들의 무능을 덮고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얘기. 그리고 1948년 여수 순천 사건 직후 이승만 정권은 김구와 한독당을 이 사건과 연결시켜 정치생명을 묻어버릴 계략을 보였다는 것으로 비춰볼때, 이승만 정권의 반대파 탄압이 얼마나 무차별적이었는지 설명이 가능하고 또 하나 따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주목함으로서.. 2013. 1. 17.
<희망을 주는 책 소개> 차리석 평전 일병 휴가를 나와 국사학과 장석흥 교수를 찾아갔다. 독립운동을 했던 조병옥의 노선이 무엇이었는지 너무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국내에 귀국하여 미군정의 관리로 들어가 제주 4.3 항쟁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한 것은 커다란 오점을 남겨 독립운동가임을 무색하게 한 것이다. 좀 더 올라가보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에 있어 어떠한 구체적 역할을 하였나 당연히 이러한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목숨을 걸고 학도병에서 탈출하여 상해 임시정부까지 찾아온 장준하 같은 이들은 임시정부의 분열상에 크게 실망하기도 하였다. 물론 나는 임정의 역할이 막대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절대적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48년 남북 4요인회담의 의미를 물어봤는데 김구, 김규식 박사가 북측 지도부의 선전에 넘어갔다고 보았다. 아무.. 2013.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