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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처절하게 독서하기> 1910년, 그들이 왔다

by 이시대 2013. 3. 25.

<처절하게 독서하기> 1910년, 그들이 왔다.


 

 



<1910년, 그들이 왔다, 이상각, 효형출판>

올해는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시대적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은 여기저기서 진행되었고, 한국에서는 특히나 그런 분위기가 높았지만 일본에는 기껏해야 ‘양심적인’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인사들만이 조선병탄에 대한 사죄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왜 일본인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는 것일까?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1910년, 그들이 왔다>를 펼쳤다.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이 전 세계로 확장되던 1900년 초입 어느 즈음에 내부개혁을 단행한 일본 정부는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벌론’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대륙진출을 확보하기 위한 일본의 이익선을 조선 대륙이라 상정한 일제는 청나라와 러시아 대국을 격파하고 조선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청나라와 같은 큰 대륙과 러시아라는 대국에 정면승부를 하고 승리를 경험한 일제는 적어도 삼국간섭과 같은 서구의 견제가 없었더라면 아시아의 주도권을 이미 획득한 셈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국력을 누구보다 익히 알고 있을 조선의 엘리트들은 소극적으로 반대를 표명한다든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편입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의 조선적 현실은 식민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조선의 엘리트들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이미 친일, 친러, 친청으로 갈려 조선의 진로를 모색했던 이들은 각자의 방향이 진심으로 망국을 피하는 ‘구국의 결단’으로 생각했다. 그 안에는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려는 본능적 욕구가 기본적으로 섞여 있었다. 결국 훗날 청나라와 러시아가 조선에서 패퇴하자 조선의 정치 지형도 정리가 되었지만 그러한 대립의 과정에서 러시아에 기대어 일제를 견제하고자 한 명성황후의 시해는 일제의 잔혹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서구열강들이 자체를 정비하고 근대화의 초석을 닦을 때, 국제정세에 어두워 결정적인 순간에 고립을 자초한 조선이 할 수 있는 진로 모색이란 등거리 외교, 혹은 기대기였다. 이런 무능에 대한 부채는 훗날 고스란히 조선민족이 감당해야 했다.


그렇다면 조선의 엘리트들이 갈팡질팡하며 중심을 잡지 못할 때, 일제는 무엇을 했을까? 어떻게 단기간에 국력을 향상하고 이를 토대로 침략을 단행한 것일까? 게다가 현대전에서도 수행하기 어려운 동시다발적 전쟁을 수행한 것일까, 그 주역은 누구인가. <1910년, 그들이 왔다>는 조선병탄과 대륙침략의 주역들의 면모를 소개한 책이다.


일본 사무라이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사이고 다카모리(1827~1877), 먼저 그를 통해 일본의 내정이 어떻게 통일되는 과정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아직 전국의 권력이 통일되지 않았던 시절 사이고 다카모리는 28세에나 와서야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밑에서 비밀연락책을 맡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실질 행정가인 나리아키라를 통해 국제정세를 살폈다면 정신적 스승인 도코는 다카모리에게 일본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정한’ 밖에 없다는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군인으로 거듭난 그는 메이지 신정부를 호위하고 대립하던 막부군의 차례로 물리침으로서 메이지 정부를 중심으로 중앙집중권력을 창출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 후 내정의 핵심에 오르게 된 그는 징병령을 제정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조선의 정세를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아직까진 조선정벌에 대한 급진파와 점진파가 대립하는 분위기에서 주도권은 다카모리를 비롯한 급진파에게 있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조기에 조선정벌이 가능할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파견을 나갔던 이와쿠라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하자 조기 정벌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고 ‘선 부국강병’을 외치자 급진파는 일시 후퇴하고 다시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양파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결국 라이벌 오쿠보에게 다카모리는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으며, 오쿠보 타도를 위해 거병을 일으키다 처참히 실패하게 된다. 정국을 장악한 오쿠보는 내치를 완성해나가며, 조선 정벌의 실험을 하게 되는데 급진파나 점진파나 일본은 이미 ‘정한론’에 경도되어 있었다.


모든 주변 여건은 조성되었다. 쿠데타와 쿠데타를 마치고 막부의 시대에서 메이지 유신의 신 새벽을 여는 일본에서 1867년 15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게 된 메이지 무쓰히토(1852~1912)는 존왕파의 지원에 힘입어 상징적 존재에서 강력한 실권을 지닌 권력자로서의 일왕이 탄생함을 알렸다. ‘부국강병’ 하나로 국력을 모으기 위해 집권자들은 봉건체제를 타파하고 서구 열강의 학습을 통해 근대화의 박차를 가했다. 서구의 열강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오히려 그들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차입하려 한 것이다. 사절단을 파견해 그들의 과학, 군사, 지리, 문화 등을 파악하고 내각에 외국인을 끌어들이는 등의 적극적 자세를 펼쳤고 내부적으로는 정부조직 개혁, 신분제도 개혁, 일본은행을 설립하여 화폐통일을 시도하는 등 전 방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파견된 사절단이 돌아온 뒤 벌써 ‘정한론’이 정국의 중심으로 대두되는 등 국력이 크게 상승되었다. 무쓰히토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본의 정계는 이때부터 식민지 개척을 본격화하기 위해 동아시아에서의 도발을 시도한다. 결국 일본이 항상 열등감을 갖고 있던 조선을 장악함으로서 그 처절하게 화려한 무쓰히토는 일본에는 강대국의 신화를, 조선에는 침략의 화신으로서 역사에 남게 된다.


여기 한 청년이 총을 겨누고 있다. 일본의 제국화를 주도하고 동아시아 침탈의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조선의 청년 안중근에게 총탄을 맞고 숨졌다. 피압박 식민지인들에게는 찬란한 총탄이었으며, 일제에게는 제국이 무너지는 총탄이었다. 미천한 신분으로 승승장구하여 일본 정국을 장악한 이토 히로부미는 원래 ‘정한론’에 앞장 선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론 정한의 가치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의 제도 개혁을 통한 근대화를 중시하고 협상가로서 전쟁에 동의하지 않는, 어찌 보면 학자형 인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약관의 나이에 일본 정계를 장악한 그는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조선을 행정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통감부 설치를 주도한다. 또한 조선정세의 주도를 늦추지 위해 청일전쟁도 불사하지 않음으로서 협상가와는 다른 이중적 잣대도 여지없이 드러냈다. 러시아와의 갈등도 피할 수 없는 일로 다가왔다. 청일전쟁의 성과가 삼국간섭으로 인해 후퇴하면서 조선에 얽혀 있는 모든 실타래를 제거해야만 했고, 러시아는 이미 이빨을 드러낸 맹수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고 또 다른 삼국간섭을 방지하기 위해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통해 미국을 방패막이로 세워둔 것을 마지막으로 조선을 국제정세에서 완벽히 고립되는 상황을 만든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명성대로 결과적으로 승리하는 ‘협상의 귀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든 작업을 마치고 퇴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제 국제적 명성을 가진 정치인이 되기 위해 러시아를 순방하다 안중근을 만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조선 병탄의 역적은 제 7대 조선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1874~1955), 3대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는 비록 3.1 운동의 영향이었다고는 하나 이른바 문화통치를 폈다면, 미나미 지로는 일선동조론에 기초하여 황국신민정책을 악랄하게 펼치기 시작한다. 창씨개명을 통하여 조선의 혼을 앗아가려 함은 물론, 조선을 병참기지화시켜 무너지는 제국의 군사역량을 식민지의 일원으로 보충하려는 정책을 펼친 인물이다. 일본정규 육사를 거쳐 러일전쟁에 참여하여 승승장구한 정치군인 미나미 지로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조선에 부임하였다. 그것은 첫 번째 일본 황제를 조선에 모시는 것이었고, 일본 군국주의가 욱일승천 할 수 있도록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항하는 조선인들에 대한 기선제압이 필요했다. 내선일체에 동조하는 이들에게는 당근을 주고 소극적으로나마 반항하는 이들에게는 무차별 살육을 허가했다. 회유의 효과는 머지않아 드러났다. 당대의 명망 있는 지식인들 상당수의 입에서 ‘내선일체’ 주장을 이끌어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지식인들은 전쟁터에 조선의 청년, 학생들을 내몰았다. 아, 지식인의 나약함과 기회주의여. 이들은 훗날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행위를 세탁하기에 바빴지만 미나미 지로는 그런 전략을 통해 식민사관을 깊게 주입시키려 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건강악화로 석방된 그에게 남은 것은 지나간 ‘황폐한’ 영광과 노쇠한 몸뚱이였다.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 백성의 입장에서는 일제는 제국주의 국가이자 용서하지 못할 만행을 저지른 나라다. 하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는 찬란한 과거의 영광이라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현재 겉으로는 과거사에 대해 유화적일지언정 속으로는 본심을 감추고 있는 것이 정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건 사람의 심리 아닌가. 고구려가 주변 부족을 정복하고 만주로 뻗어나가는 역사를 우리는 자부심의 역사로 보는가, 자성의 역사로 보는가. 미국인은 미국의 서부개척사를 인류의 치욕으로 보는가, 아메리칸 드림으로 보는가. 자성을 요구하는 바탕에는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덮칠지도 모른다, 조심해라”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 국제사회의 냉엄한 결론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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