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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삶 흥선대원군의 삶김동환의 view 2014/02/22 00:44 이시대 대원군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예전에 대원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척화에서 오는 고루함, 천주교 박해, 무리한 경복궁 중건에 따른 민중들의 삶의 피폐 등이었는데 역시 한 인물에 대한 삶을 함부러 재단해서는 안되는 모양이다. 서원 철폐와 호포제 실시, 세도정치 청산, 비변사 폐지는 그 당시에도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지금봐도 개혁의 최고수준이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섭정기간에 단기간을 통해 쌓아올린 리더쉽이 단단히 한몫했음을 알 수 있다. 민중들은 그의 말을 신뢰했고 섭정 이후 고종 친정시기 찾아온 국란기마다 그의 역할이 요구되었다. 이런 정치에너지는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과거를 보니 여실히 그 답이 나온다. 왕의 종친.. 2019. 1. 29.
의열단원들의 삶처럼 의열단원들의 삶처럼김동환의 view 2014/03/09 00:21 이시대 3월 1일 이후로 머리속에 빙빙 도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엔 48년 통일정부의 수반이 되기도 할 뻔한 김규식 선생에 대한 일대기를 짧게 기록해보려 했지만이미 너무나 유명해서 그런지 '굳이' 라는 생각이 들고..한국의 현대사에서는 도무지 다룰 수가 없는 '조국광복회'의 권영벽에 대한 기록을 남겨볼까 하다 역시 무리수를 둔 다 생각하여 그만둘까 하다가, 우연히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본 문구가 생각나 책을 뒤적였다. 1930년대 당시 상해는 서울에서 넘어온 항일운동가, 만주에서 온 운동가, 미국에서 넘어온 운동가, 소련에서 넘어온 운동가들이 한데 모여, 정치정세를 토론한 '민족적 낭만'이 풍부한 도시였다. 27년 홍커우공원에서 벌어.. 2019. 1. 29.
6.10만세운동의 중요성 6.10만세운동의 중요성김동환의 人文일기 2014/06/16 00:25 이시대 오늘이 6월 10일이라 그런지 sns상에 6.10이야기가 많이 올라옵니다. 6월 항쟁을 승리적으로 끝내고 탄생된 그 놈의 6월 체제가 뭔지, 이젠 6월 체제를 극복해야한다는 주장도 많긴 한데 꽤 크게 공감되는 것은 국회의원의 정수를 확대하자는 주장입니다. 1987년에서 아마 의원정족수가 한명 증가해 현재는 300명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그간 인구가 얼마나 증가했으며, 사회의 각 영역이 얼마나 세분화되어 있는데 지금의 대의구조를 갖느냐는 것이죠. 비례대표제의 확장도 이 의원정족수 증가와 맞물려 계속해서 논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튼 다들 이 87년의 6.10을 이야기 하는데, 저는 훨씬 더 과거의 6.10.. 2019. 1. 29.
조봉암 연구를 읽고 조봉암 연구를 읽고김동환의 人文일기 2014/07/28 00:08 이시대 조봉암이란 인물을 처음들어본다거나 그 정치적 행보를 아예 모른다거나 하진 않더라도, 이번 기회에 조봉암과 진보당의 노선을 다시 한번 살피고자 박태균의 '조봉암 연구'를 독해했다. 지난해 대법원은 비로서 진보당 사건이 조작사건이었음을 판명하고 조봉암에 대한 복권을 시도했다. 그 후로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조봉암 노선을 공부하고, 사회민주주의를 당의 강령으로 재설정하려하는 시도들이 있던 만큼 '진보당 사건'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강령과 노선을 기초하고, 이승만과 한민당, 민국당에 대항하는 선명 야당을 구축하려 한 조봉암 노선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제3지대 정당을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지 일정부분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 그 핵.. 2019. 1. 29.
<다시 보는 8.15인물 열전- 이승만과 존 하지> 김동환의 view 2014/08/21 00:23 이시대 "북한군이 내려오고 있으나 국군이 반격을 개시했으니 안심하라" 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피신한 이승만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신을 계속할 예정이었다. 이승만은 북한군의 남하를 잠시나마 저지하기 위해 한강다리를 폭파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선조의 환생이란 평가를 남겨주었다. 하필 시대가 너무 복잡하고, 한명의 영웅이 발생하는 상황을 완벽히 대처하기엔 너무나 곤란한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선의 의지라 하더라고 상황은 악화될 수 있었으며, 악한 의지라도 상황을 좋아지게 만들 수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최대한의 너그러운 환경을 조성해놓고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승만은 결국 권력 경쟁에서 1인자가 되었다. 사심을 포장하려 하지도 않았고, 의지는 곳곳에 드.. 2019. 1. 29.
<다시 보는 8.15인물열전-존 하지와 이승만> 김동환의 view 2014/08/18 19:46 이시대 북위 38도 이남에 대한 점령, 점령부대에 대한 반란금지, 영어를 공식언어로 한다는 더글러스 맥아더 명의의 팸플릿이 45년 9월 서울에 이리저리 흩어져있었다. 그 위압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한국사람들은 연합국의 승리가 한반도의 해방을 가져왔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아직 갈등국면이 표면화되기 전까지는 소련 역시 우국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한국사람들은 비록 연합국의 내정 개입을 예상하면서도, 자력을 기르기 위한 시도 혹은 연합국 진주 이후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자체의 정무행정기관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을 미군 진주 이전에 수립하는 등 나름의 대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군정 사령관에 취임한 존 .. 2019. 1. 29.